“음은 더 적게, 공명은 더 많게 하고 싶었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이어지는 공간이다. 소리로 샤워를 하고 싶었다. 나의 지친 육신과 영혼에 작은 치유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화 ‘마지막 황제’(1987)로 미국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은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3.28)가 유작이 된 앨범 ‘12’를 발표하며 한 말이다.

바깥에서 별다른 약속이 없거나 심사가 좀 흐트러진 날은 나들이를 꺼린 채 집에서 해종일 견딜 때가 더러 있다. 아내가 외출하면 나 혼자 덜렁 집을 지킨다. 베란다 유리문으로 들어오는 여름 햇살을 지켜보며 무념무상의 망중한을 즐길 때가 많다. 원고를 청탁하거나 누가 뭔가를 부탁하는 경우 외엔 거의 전화가 없다. 이따금 아내가 불쑥 틈입해 지금 뭐 하고 있느냐며 안부를 묻는 따위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경우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가끔 입술이 바싹 말라 부르트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놓고,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몇 마디 허구적인 대사를 웅얼거려 보기도 한다. 가끔은 마른 침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애써 축이기도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나이가 드니 뭐든 여백이 많은 것이 좋다. 영화도 대사가 적고 여백이 많은 것이 좋아진다. 빈 공간과 여백, 그리고 침묵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네포엠 같은 사유의 영화를 만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까닭도, 진중하고 유장한 서사적 리듬과 빈 침묵으로 허구적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채우게 하는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연극 또한 마찬가지다. 빈틈 없이 꽉 채워진 서사로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작품보다는, 어딘가 여백과 침묵이 군데군데 도사린 채 관객에게 상상의 틈을 많이 열어놓는 느슨하고 느린 연극이 좋아진다. 1980년 첫 희곡을 공연한 이래, 지금까지 35편의 희곡을 쓰고 공연하면서 얼마나 많은 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던가. 정작 연극의 주체이며 핵심인 배우들은 이런 조용하고 여백이 많은 연극을 만나면 곤혹스러울 것이다. 침묵과 여백이 많은 빈 공간과 시간을 표정 연기와 마임으로 채워야 하니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감정 소모가 있겠는가. 여백을 그저 물리적 시간의 인터벌로만 채워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상상력의 연금술로 빈 여백을 채운다는 게 여간한 내공이 없는 배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 만나 소통하고 사귀는 것 역시 그렇지 않겠는가.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내고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보통 일인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도 여백이 필요하다. 꼭 속에 있는 말을 상대에게 터진 봇물처럼 쏟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상대의 눈빛과 표정만 바라봐도 침묵 속에서 수천수만 마디의 말과 속내를 읽어내는 그런 여백과 침묵도 있지 않은가.

하루 내내 바라보면서 한마디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저 눈빛만 바라봐도 수 없는 마음의 풍경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침묵과 여백 속에서 이따금 농담 같은 선문답을 툭 내던져도 편안한 그런 사람도 가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말수가 적은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는 요설을 쏟아내는 사람을 대하면 숨이 막힌다. 혹시 내가 말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작은 신의 아이들’(1987)이라는 외화가 있다. 정상인인 교사가 그 학교의 청소부인 농아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그녀에게 강박적으로 말을 가르치려고 애를 쓴다. 남자의 집요함에 여자는 어느 날 무언의 수화로 “난 침묵 속에서 지내도 너무 편하고 좋아요. 그런 나를 왜 당신들 말의 세계로 자꾸 편입시키려 애를 쓰고 그래요. 제발 날 좀 그대로 둬요!”하고 항변하는 대목이 있다. 말이 많은 세계에 대한 암묵의 저항인 셈이다.

사랑하면 되었지 말이 무슨 필요 있겠는가. 혹시 대화의 자리에서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더라도 부디 용서하시라. 지금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니, 말하는 당신의 고운 마음을 쓰다듬으며 지금 수천수만 마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내 침묵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