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슬로건은 그 도시가 지향하고,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입니다. 그 속에는 인문학적 특성과 함께 지리적 특성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슬로건이라는 이미지는 그 도시의 문화원형을 오롯이 품은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년 전 해운대는 내륙지방 중학교의 수학여행지로 인기였습니다. 약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지금은 폐역이 된 해운대역에서 길게 줄지어 바다로 걸어가는 동안 점점 다가오는 바닷냄새는 신세계로 가는 기차표 같았습니다. 두엄냄새, 흙냄새 속에서 성장한 우리에게 바닷냄새는 처음의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컸던 충격은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땅의 크기가 달라지는 현상이었습니다. 경지 정리된 네모난 땅만 보다가 줄어들고 늘어나는 땅의 도시, 변화무쌍 자유자재의 바다 도시 부산은 환희 그 자체였지요.

오랜 세월 부산 살이. 지금 해운대의 모습은 그때의 해운대를 상상 못 할 만큼 달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부산의 모습도 30년 전, 60년 전의 부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비록 오래전의 모습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도 땅에 스며든 지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되다가 잊히고 마는 원형에 대한 물음표는 부산을 읽고 걷고 쓰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아찔함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가령,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화가들과 부산의 화가들이 열어간 미술 세계가 그렇습니다. 전쟁의 고통, 실향과 이향의 아픔 속에서 예술 혼을 놓지 않았던 작가들. 그들의 궁핍한 현실에 틈을 열어주었던 영도의 대한도기…. 다른 사람의 꽁무니만 따라가지 말고 추상 이후의 세계를 열어가자는 대화를 나누었던 1953년 어느 날의 광복동 뒷골목 다방…. 절망의 시대, 다방은 화가들의 전시와 문인들의 작품 발표, 나아가 다양한 예술가들의 담론이 형성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부산과 부산의 다방 문화는 한국예술사의 중심지인 셈입니다. 아쉬운 것은 정작 중심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찔한 호기심 두 번째는 나전칠기와 부산입니다. 1960, 70년대 내 집을 마련하면 제일 먼저 장만한 것이 안방의 자개농이었습니다. 자개농, 자개화장대…. 출세한 사람은 자개명패를 책상에 올려놓았으며 표창패에도 자개를 박았으니 자개는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예술이 된 나전칠기는 통영에서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슬쩍 비집고 들어가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전칠기에 있어 부산도 묘한 개연성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날 부산의 지명으로 변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이전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거칠산국은 신라에 편입되어 거칠산군(居漆山郡)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동래군(東萊郡)으로 개명되었습니다. 거칠산국의 칠(漆)은 옻칠을 말할 때의 칠(漆)입니다. 지금도 칠산동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래지역은 예로부터 옻나무가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편 부산의 선사 유적지 동삼동 패총과 동래패총은 옛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거칠산국 칠산동 조개무덤….

가끔 언어의 시원을 연어처럼 거슬러 가다 보면 원래의 뜻이 왜곡되어 오늘에 고착되는 경우도 더러 만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풍류’입니다. 풍류란 유불도를 통섭한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고운 최치원에 의해 최초로 제시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풍류란 모든 현상이 각각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사유체계입니다. 풍류신학의 창시자 유동식 교수는 풍류를 ‘멋’이라 정의한 바 있습니다. 멋은 품격과 인격을 두루 갖추고 지혜와 자비로 세상과 소통하고 바라보는 삶의 자세에 스며든 아름다움입니다. 이를테면 멋이란 감각적 외형을 담아내는 내면의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풍류는 그 정신적 가치는 퇴화되고 유흥의 의미만 남아있습니다.

무시로 고개 드는 아찔한 호기심은 대상을 관찰하게 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는 시인의 말처럼 오래도록 대상을 보고 있으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어떤 것들이 좀벌레처럼 기어 나옵니다. 바다를 만나는 순간 강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은 지점이라든가. 이젠 아파트가 된 염전에서 수차 돌리던 일꾼의 갈라진 뒤꿈치라든가. 표지석으로만 남은 영가대 본 터라든가. ‘돈텔마마’를 누비던 파밭 아지매라든가…. 건축적 폐허가 상실을 준다면 역사적 폐허에서 만나는 상상력은 부산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부산의 새 슬로건이 ‘부산이라 좋다’ 입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부산이라 좋다’ 그 뿌리에는 해양문화와 강문화가 퇴적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멋진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교호되어 만들어 가는 부산이라 더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