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개봉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참혹했던 독일과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활약한 소련군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를 조명했다. 영화 초반 바실리(주드 로 출연)는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투에 투입된다.

당시 소련은 군수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무기인 총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바실리는 총을 받으려고 줄을 섰지만 결국 그의 손에는 총알 몇 발이 전부였다. 총을 나눠주던 군인은 “총 없는 자는 총 가진 자를 따르고, 총 가진 자가 쓰러지면 주워서 쓰라”고 지시했다. 소련군은 총도 없는 군인들에게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 앞으로’ 명령을 내렸다.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군 기관총 세례를 받아 대부분 죽었다. 운 좋게 살아남아 후퇴한 병사들을 기다린 건 아군인 소련군 독전대의 기관총이었다. 독전대는 아군을 감시·감독하는 부대로 2차 대전에서 나치와 소련이 운용해 악명을 떨쳤다.

소련과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지옥에 가까운 시가전을 벌여 양측 사망자가 무려 100만 명에 육박했다. 전쟁 초반 일방적으로 밀리던 소련은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단숨에 2차 대전 전세를 뒤집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이 보여줬던 전투 방식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다시 등장했다.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에게 야전삽을 들고 근접전을 펼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고 한다. 탄약 부족으로 포격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총과 삽만 들고 우크라이나군 거점으로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소련식 독전대의 부활이다. 지난달 27일 외신은 러시아군 강습 부대 생존자 가운데 일부의 폭로를 공개했다. 그들은 열흘 넘게 우크라이나군의 박격포와 야포 포화를 견뎠지만 부대원 상당수가 죽거나 다쳐 후퇴를 결심하게 됐다. 하지만 상부가 불허했고, 그들 뒤에 독전대를 배치해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열악한 상황을 딛고 당대 최강인 독일군 공격을 물리쳤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전쟁은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러시아는 방어군이 아니라 침략군이고 우크라이나보다 객관적 전력에서 훨씬 앞선다. 그런 러시아가 드론이 날아다니며 전쟁을 주도하는 시대에 삽 들고 진격하라는 명령 하달도 모자라 독전대를 배치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을 감행한 결과가 아닐까.

김희국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