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학 시간강사인 내 시간표에는 공강이 길다. 점심을 해결하고도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꽤 남아 연구실이 따로 없는 처지로선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 그 길지 않은 산보의 와중에 이슥하게 스민 봄이 느껴진다. 세밀하게 봄을 표현할 말을 더듬거려본다. 어린 시절 꿈꿨던 시인되기는 실패했으나, 더 적확한 설명의 언어를 찾으려는 습관은 여전하다. ‘습관?’ 그것도 맞춤한 단어인지 의심이 든다. 그렇게 의심해 도달하려는 곳이 쓰는 자의 내부였다면, 시인되기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의심의 초점은 ‘가지런한 설명력’ 쪽으로 향해 있었다. 표현욕망이 커질수록 내가 쓴 글이,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두려움도 함께 자랐다. 나와 한집에 사는 죄로 매 초고를 읽어야 하는 아내에게 주로 묻는 말도 이것이었다. “이해가 돼?”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이 이 여인의 고초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읽힐지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떨치기란 어쩌나 힘든지.

생각은 머리로 하는 거라 알고 있지만, 두 발을 엔진 삼는 것 아닐까. 발밤발밤하는 동안 지나간 겨울들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 갓 배웅한 지난겨울은 다른 수십 번의 겨울들과 달랐다. 그 겨울은 신춘문예에 투고하지 않았던, 그래서 당선이냐 낙방이냐 애면글면 결과를 기다릴 필요 없는 첫해였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부터 이십여 년 만에 맞은 그 첫해 말이다. 십일월부터 아직 당도하지도 않은 실패를 예감하며 우울해지던 것이, 투고를 끝낸 십이월 들어서는 마음의 진폭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곤 했다. 당선소감을 미리 썼다 지우고 급전직하 추락하는 저 요란한 감정들로부터 놓여났으니 평온해질 법도 한데, 그 같은 나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신춘문예 당선은 투고와 결과를 기다리는 지난한 일상을 바꾸어주는 만능열쇠가 아니었다. 작년 한 해, 계절마다 각종 공모와 기금, 문예지에 소설을 디밀어본 것을 헤면 양 손가락이 모자랐다. 그러고도 돌아온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강을 맞은 캠퍼스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번져났다. 저이들의 웃음에 예쁜 색이라도 입혀놓은 양, 하늘로 퍼지는 소리를 좇아 고개를 젖혔다. 지난겨울 중에서도 칼바람이 유난했던 일월 어느 날이었다. 종종 어울리는 가난한 연극쟁이 형, 동생과 초저녁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난 ‘대문호’였다. 개인의 세월을 알 만큼 아는 이들의 선의로 가득한 바람을 모를 리 없으면서, 그날의 난 뾰족해졌었다. “그만 좀 하시라고요. 현실도 모르면서….” 불뚝 성질을 내놓고 후회가 인다. 모를 게 뭐가 있나. 나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할 리 없는 이들이 아닌가. 몰려드는 미안함을 덮으려 술을 부었다. 기타도 치고 노래를 불러 봐도 좀체 덮일 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는지 형이 말했다. “재운이 작가 된 거 알면, P 선배가 좋아하겠다.” 한동안 조감해본 적 없던 어떤 이에 대한 기억이 열린다. 우리는 몇 다리를 건너고 건너 기어이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연결음이 내는 고요 속에서 나는 얼근덜근 오르는 취기에 무너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러고 보니 학생시절에도 공강 때면 도서관으로 향하는 이 오르막을 걷곤 했다. 이십 년 전에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는다. 지난 시간, 얼마나 많은 겨울을 보냈는지 헤느라 얼마나 많은 봄이 왔는지는 몰랐다. 개강부터 종강을 떠올리는 학생이 없듯, 작가의 삶이 얼마나 오랠지 알 리 없는 출발선에서 실패를 헤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어차피 읽고 쓰는 삶은 예정된 실패를 끌어안고 한 발씩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수화기 끝에서 흘러나오는 건 P 선배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했던 기억과 세월도 함께였다. 길지도 않은 통화 끝에 선배는 물었다. “너 아직 글짓기 하니?” 내가 그 대단한 신춘문예 당선자라는 사실을, 세상은 여전히 너무 모른다. 하긴, 이놈의 세상엔 그놈의 신춘문예보다 대단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절로 공손해지는 건 내 마음뿐이 아니다. 지난 실패들도 작아진다.

나는 대학교 1학년생으로 돌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선배님, 송구하오나 아직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