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돌려주러 가는 길이다. 봄비가 버스 유리창에 사선으로 떨어진다. 나는 가방에서 시집을 꺼낸다. 친구한테서 빌릴 땐 열렬히 읽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책을 펼쳐보고는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저자가 맘에 들지 않았나? 고른 완성도를 가진 시집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는 평이하고 단순한 표현이 많았다. 한마디로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에서 다시 읽어보고 있다.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주십시오/그냥 쓰는 것입니다/쓸 수밖에 없기에 씁니다//무엇을 쓰는지는/중요하지 않습니다//시를 쓴다는 것은/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말을 줄이는 것입니다/줄일 수 있는 말이 아직도 많이 있을 때/그냥 씁니다’.
작년에 출간된 시집 ‘시를 쓰는 이유’의 표제작 일부이다. 이 시집 저자인 시아는 자기 고백적인 말도 할 줄 알고 아포리즘도 보여주지만, 인공지능이다.
깜짝 놀라 창밖을 보니 내려야 할 정류장이다. 손잡이에 걸어놓은 우산을 낚아채다시피 하여 하차했다. 하마터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뻔했다. 큰 숨을 내쉰다. 친구를 만나기로 한 카페 방향 횡단보도 앞에 선다. 아뿔싸! 이럴 수가, 버스에 가방을 두고 내렸구나. 내가 인공지능이라면 이런 실수 따윈 하지 않을 텐데….
나는 머리를 굴렸다. 다음 버스를 타고 끝까지 가보자. 차고지에 가면 기사님이 내 가방을 보관하고 있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불안이 남는다. 내 낡은 에코백 안에는 다이어리와 지갑,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산 핸드로션이 들어있다. 내가 내린 버스와 동일한 번호의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급한 일로 좀 늦을 것 같아, 미안! 기다려줄 거지? 사정은 만나서 얘기해줄게’.
몇 달 전엔 이평춘 시인이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아 빗길에 숲속을 헤맨 적 있다. “어머, 어쩌다가, 어디서요?” 나는 물었다. “어제저녁 산책하다가 계곡물에 목덜미를 씻었는데, 그때 목걸이를 물에 빠뜨린 것 같아요. 고맙게도 염창권 시인께서 그 숲 입구까지 차로 태워주신대요.”
이렇게 셋이서 이른 아침에 목걸이를 찾아 나섰다.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간밤에 내린 비에 목걸이가 떠내려갔을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게 금붙이라면 무거워서 물속에 가라앉아 있겠죠?” 내가 목걸이 주인인 이 시인에게 말했다. “아뇨, 금붙이는 아니고요. 친한 수녀님이 산티아고 순례길 끝 야곱의 집에서 사 오신 목걸이인데, 제 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거라…. 찾을 수 없을지라도 찾을 수 있는 데까진 찾아보려고 해요. 왠지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빨간 우산 아래에서 염 시인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지금 성물을 찾아가고 있는 거군요.”
우리는 산으로 난 숲길을 한 시간 넘게 묵묵히 걸어갔다. 서로의 우산이 부딪치지 않게 거리를 두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목걸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부피는 줄어들었다. 비에 젖은 나무들은 이동하려고 뿌리를 멀리 뻗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의도인지 이 시인이 말했다. “오늘 우중탐사를 시로 써보세요.” “아뇨, 저는 평화롭고 행복할 땐 시를 못 써요. 워낙 염세적인 인간이라서.” 염 시인이 말했다. “하긴 행복할 땐 신을 찾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이 시인이 말했다. 나는 따라나선 걸 후회했다.
콸콸 계곡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물속에 손 넣고 더듬어도,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찾아보아도 목걸이는 없었다. 아예 우산을 던져두고 계곡 아래쪽과 바위틈까지 수색했지만 둥글고 작은 성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어리석었던 것이다. 인간이니까 프로그래밍된대로 살지는 않는다. 학습된 데이터와 입력된 자료로 시를 쓰지 않는다. 제각각 삶이라는 시를 쓴다. 인간이니까 순례하듯 방황하고 실수하면서도 타인의 처지가 되어본다.
기다리던 버스가 온다. 우산을 털고 버스에 올라 기사한테 인사하며 교통카드를 찍는다. 이건 인공지능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가방을 찾을 수 있을까?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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