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음이 가 닿는 곳, 짧은 순간에 전혀 다른 무엇을 느끼거나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기대나 의도가 없었기에 놀라움과 반가움은 더 크지요. 느닷없이 들이닥친 상황들을 마주하다 보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새삼 그 모든 것들이 특별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도시 전체가 안개로 아득하더군요. 길을 나섰습니다. 순전히 안개 때문에, 안개에 싸인 도시의 굽굽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내를 빠져나와 한참을 외곽으로 돌아나갈 때 쯤 안개는 조금씩 옅어졌고 강 건너편 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능선에 기댄 채 비스듬히 드러누운 여성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뚝한 콧날, 부드럽게 세워 올린 속눈썹, 도톰하게 오므린 입술, 적당하게 볼록한 이마, 뒤로 젖힌 긴 목선, 풍만한 가슴과 허리, 강물 속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채. 아, 곡신(谷神)! 나는 순간 노자 도덕경 속 곡신을 불렀습니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여성성과 모성성으로 대지를 살려내는 생명의 뿌리지요. 쉼 없는 작용으로 천지를 낳고 기른다는 대지의 여신. 곡신은 왜 느닷없는 순간에 나타나 춥고 지난한 내 겨울을 건드렸을까요. 어쩌면 건조하게 시들어가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가장 극적인 곳에서 극적인 모습으로 나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 위로 둥근 물결을 만들며 조용조용 떠돌고 있는 물닭들도 버석거리는 내 겨울을 두드렸습니다.

강변을 서성이는 동안 햇살이 퍼지고, 안개가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맞은편을 바라보았을 때 좀 전에 만났던 아름다운 곡신은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나목과 송전탑들이 산의 전신에 박혀 있었을 뿐입니다. 주름 그득한 얼굴과 굽은 등, 퍼석거리는 머리채를 겨울바람에 내놓은 곡신의 실체. 험하게 굴곡진, 그러나 절대로 죽지 않는, 죽을 수 없는 불사신들.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 내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까지 한꺼번에 다 보게 된 것 같았습니다.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들이 세상을 살리지요. 잊지 말아요, 그 지극한 힘을! 낮게 중얼거리는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당신은 물수제비만 날리고 있더군요. 물수제비가 만든 파문 속으로 마냥 빠져들 듯이 말입니다. 그래요. 매료된다는 것은 어떤 계산도 없지요. 당신의 물수제비를 품은 강은 이제 예전의 강이 아닐 것입니다. 물살의 방향도 흐르는 속도도 달라지겠지요. 어떤 장르는 전혀 의도치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새해 들어 청첩장과 난임으로 고생하던 부부의 잉태 소식, 지인 두 분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만혼의 신랑신부나 천신만고 끝에 부모가 되고 있는 부부에게 그 어떤 말로도 기쁨을 전하기엔 부족했습니다. 본향으로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생전의 뜨거웠던 삶을 기렸습니다. 세상의 구성원인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살릴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앞선 이들의 지혜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자신만의 도와 덕을 갖춰 이웃들과 나누는 일, 세상은 그렇게 천세만세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여기저기서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심각하면 심각한 만큼 다 함께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한 방울씩 흘러드는 물방울이 혼탁해진 웅덩이를 맑게 하듯, 맑은 물줄기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정화되고 재생될 것입니다. 날마다 달을 향해 한 걸음씩만 나아가도 달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그때 선생은 늘 그랬지요. 설령 달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근방의 별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먼 산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군요. 겨우내 다 떨어낸 몸으로 고요하게 안을 향해 서 있던 나무들도 물을 올리는 중입니다.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버들가지들이 낭창낭창 흔들립니다. 길섶엔 뿌리를 내린 작은 풀들이 자주 노랑 흰 꽃들을 달았습니다. 촉촉하게 물을 올려 마른 대지를 살려내는 곡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낍니다. 봄입니다. 봄물이 오르는 우리도 세상의 꽃과 잎이 되어 어둑한 귀퉁이를 밝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