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서로 다른 용도의 안경이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제일 아쉬운 것은 커피도 아니고, 슬슬 고파지는 배도 아니다. 집에 두고 온 노트북용 안경이다. 안개꽃 뭉치 사이로 몽글몽글 떠오른 장미꽃처럼 글자들이 로맨틱해 보인다. ‘노안’ 덕분인데 글자가 로맨틱해서 어디에 쓰겠는가. 풍문으로 들었지만 느닷없는 방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느낌처럼, ‘노화’는 노안과 함께 갑자기 시작되었다.

안경을 머리밴드처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에 왜 저러나 했는데, 살다 보면 그럴 만한 필요가 생겨서 그랬던 거다. 40대 중반부터 노안이 왔음을 알았지만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되는 비밀처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마주하기 두려워 모른 척했을 뿐이다.

노안은 시작에 불과했다. 50대가 되면서 온몸이 조금씩 삐거덕댄다. 몸의 노화가 자연스러웠듯, 그동안 많이 써버려서 낡고 다친 마음에도 노화는 찾아왔다. 뜨거운 심장 대신 적당한 온도의 심장으로, 그 마음이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게 신중하게 돌보는 일이 중요해졌다. 마음의 노화든 몸의 노화든 반갑지는 않다. 중장년층들은 누구를 만나든 ‘몸 아픈 얘기’로 말이 통한다. 날씨나 가십으로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 ‘인간적’이어서 더 빨리 밀착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늙어간다는 말이다. 노화는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막을 수는 없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삶의 보편 양식이다. 지금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고 살았다.

새해 벽두부터 무척이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세계적인 노화 생물학자 싱클레어 교수가 이끄는 하버드 대학 연구진이 생쥐의 노화 속도를 빠르게 만들거나, 늙은 쥐의 노화를 되돌리는 실험에 성공했다. 연구진은 ‘세포 리프로그래밍’이라는 기술을 통해 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주입함으로써, 늙고 눈이 먼 쥐의 시력을 되찾게 하고 뇌를 더 젊게 만드는 한편, 근육과 신장 조직을 더욱 건강하게 하는 등 ‘회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와 반대로 젊은 쥐의 노화 속도를 두 배로 높여 신체의 거의 모든 조직에서 파괴적인 노화 현상이 나타나게 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러한 연구는 노화가 앞뒤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가역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며, 우리 몸에 노화를 되돌릴 수 있는 ‘백업본’이 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노화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불로장생과 회춘을 꿈꿨던 선인들이 헛된 희망을 품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나이 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연구 결과가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노화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엄연한 ‘질병’으로 간주할 것이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함께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둘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다. 노화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것은 맞지만 죽음 앞에 반드시 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삶의 가치를 더하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면, 노화는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려는 투쟁의 과정일 것이다. 서서히 느려지고 삐걱대면서 늙어감에 길드는 것. 갑작스럽게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절망감을 줄여주고자 조금씩 간을 보며 내려놓게 만드는 것. 이러한 노화의 패러다임이 인간의 과학적 노력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로 노화의 과정은 무뎌지면서 길어질 것이다. 길어진 노화의 연장선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를 잃지 않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일 관계 가치관 감정 등에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 말이다. 상실감과 무력감은 달라진 삶을 바라볼 나만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대로 설정하지 않은 채 이전의 틀대로만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서서히 느려지고 서서히 삐걱대도록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신의 배려라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달라질 삶을 담을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은 우리 몫이다. 어제보다는 좀 늙고 힘없어지긴 했지만 주변을 감싸는 내 포용력과 이해력이 더 늘어났을 것이라 믿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