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출신 이사(李斯·?~BC 208)는 애가 탔다. 자기를 중용했던 진(秦)나라 재상 여불위(BC 235·위나라 출신이다)가 실각했다. 진나라 기득권 고위층은 이 기회에 ‘외국인’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이사는 글을 올렸다. 지금도 전해오는 저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다. 다른 나라에서 온 객(客)이 없었다면 강성해진 오늘의 진나라도 없다며 객을 쫓아내려는 정책(축객)을 정면으로 반박한 글이다. 그때 진나라에는 많은 객경(외국 출신 인재)이 활약했다(공원국 지음 ‘춘추전국 이야기’ 제10권 등 참조).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했다.
천하일통을 이룬 진나라는 16년 갔다. 빨리 망했다. 멀리 내다보는 시스템이나 이념 또는 혁신이 없었던 게 확실하다. 2023년 계묘년을 며칠 앞두고 우연히 잡은 책이 동아일보 허문명 출판국 부국장이 지난해 10월 내놓은 ‘이건희 반도체 전쟁’(동아일보사 펴냄)이었다. 이 책을 들여다보니, 이건 뭐 전쟁터도 이런 전쟁터가 없다. 저자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0년 초를 비롯해 몇 번 “삼성전자는 세 번 망할 뻔한 회사”라고 말한 사실을 소개한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려니 넘어갈 것도 아니었다. 진짜 전쟁이었고 진짜 망할 뻔했다.
이 책에는 일화도 많다. 1989년 이건희 회장이 한 외국인 전문가에게 삼성 입사를 권유한다. 당사자는 거절했다. 그 당사자가 세계 최고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TSMC를 창업한 모리스 창이다. 애플 초창기였던 1980년대 스티브 잡스는 삼성전자에 주문했던 부품에 결함이 생겨 항의했다. 이병철 회장은 엔지니어들을 급파해 문제를 해결했고 잡스는 삼성에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이건 황창규 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이 2000년대 잡스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다. 삼성은 2000년대 애플과 합작하며 글로벌 리더로 도약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68년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선발 주자로서 이미 전자산업을 하고 있던 LG그룹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을 만나 이를 알렸다. 두 ‘거인’은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의 ‘통보’에 구인회 회장이 화를 냈다. LG(당시 럭키금성)가 사주였던 국제신문(책에는 부산의 K신문으로 표기)과 삼성이 사주였던 중앙일보는 이 일로 약 6개월에 걸쳐 대한민국 전자산업 앞날을 놓고 기사로 논전을 펼쳤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다른 것보다 멀리 내다보는 시스템·이념·혁신이 인상 깊었다. 창사 이래 미친 듯이 인재를 긁어모으는 일(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기술자 스카우트는 기본이었다)을 하나의 시스템이자 조직 문화로 만든 철학이나 이미 한국 정상급 기업이어서 굳이 반도체에 진출하지 않아도 됐을 법도 한데 운명을 몽땅 걸고 거기 뛰어든 결단은 결국, 멀리 내다보는 시스템·이념·혁신으로 수렴됐다. 통일 직후의 진나라에 없었던 그것이다.
이제 부산으로 돌아와 보자. ‘열고 섞자’는 원칙은 (위기가 누적된) 21세기 해양도시 부산에 꼭 필요하다. 당장 이와 관련한 특정한 문제가 터졌다는 뜻이 아니다. 열고 섞자는 시대정신·철학·이념을 올해부터는 더욱 긴요하게 여기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있다. 우선, 리더가 중심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왜·무엇을·어떻게 열고 섞을지 내면화해서 구성원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중심 없이 잘못 열고 섞으면, 빨대 꽂힌 영양분 덩어리 신세 되는 거다. 호구 된다. 남 좋은 일만 만든다. 부산 기질을 흔히 개방성·진취성이라 하는데, 과연 그랬는지 지금도 그런지 연구·토론해볼 수도 있다.
‘멀리 보자’도 아주 중요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부산시가 총력을 다하는 2030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을 보자. 나는 이게 상당히 효과가 있다고 본다. 2030이라는 시기, 월드엑스포라는 목표를 딱 정해놓고, 역량을 쏟아부으니 도시에 구심점이 생긴다. 가덕신공항·해상도시 건설, 부산형 급행철도 신설을 비롯해 숱한 부산의 과제에도 계통이 선다.
이런 노력을 확장하자. 예컨대 부산문학관 ‘건립’ 추진에 그치지 말자. ‘문학관답게’ 운영해 시민에게 열매를 돌려주기 위해 교육·전시·기획 프로그램 상설화, 연구·수집 기능 구체화가 ‘본질’(건물이 본질이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임을 알고 예산·인원을 지금부터 짜자. 부산오페라하우스·국제아트센터 등에도 이는 해당한다.
반드시 간직해야 할 가치가 그런 바탕 위에 추가된다. ‘같이 잘살자’다. 이건 도시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부산시가 공공 기관이고, 부산이 공동체인 이상, 진나라고 삼성이고 참고만 하고 우리는, 이 도시는 ‘같이 잘살자’의 가치와 철학을 반드시 품어야 한다. 토끼는 활력 있게 뛰쳐나갈 줄도 알면서 서로 섞여 의좋게 같이 잘산다. 2023년 계묘년이 밝았다.
조봉권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