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아이는 해가 짧은 겨울이 싫다. 창밖에 내린 어둠을 인지하자마자 아이는 조바심이 났다. 주말 낀 성탄절 하루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위해 되는대로 투정을 주워섬긴다. 아직 다 못 놀았는데, 왜 자기를 실은 차가 집으로 가고 있느냐고 따진다. 날로 눈치가 빨라진다. 엄마가 밉고, 타이르는 아빠는 만날 화를 낸다며 생사람을 잡는다. 자발적으로 다짐했던 산타 할아버지와의 맹세 따윈 오간 데 없다. 결정적으로 의지와 달리 왜 제 몸은 점점 잠기에 잡아먹히는지, 아이는 분통을 터뜨린다. 한두 번 되풀이되는 장면이 아니기에 룸미러로 아내를 흘깃 본다. 눈이 마주친다. 한 바퀴만 더 돌면 이내 완전히 잠들 거라는 무언의 확신을 주고받은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하루치의 어제를 쌓으며 내일로 나아간다.
아이를 키우면서 옛날을 헤적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적치한 어제의 높이가 낮기도 하지만, 맞닥뜨리게 될 내일의 파고가 원체 높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파도 무서운 줄 모르는 소년처럼 딸아이의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다. 미래와 대칭적 시간인 과거는 현재라는 찰나와 달리 매우 긴 시간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기에 필연이며 확실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가능의 영역이다. 글쓰기란, 현재라는 눈으로 광활한 과거를 들여다보고 특정한 기억을 더듬어 솎아내는 일이다. 그 노력더러 아이러니라는 가련한 진단을 붙인 까닭은 저 고정된 옛날도 현재라는 밀물에 의해 시시각각 훼손되며, 미래의 무게에 짓눌려 매몰되거나 흩어졌기 때문. 좁다란 이지(理智)의 영외지로 옮아가 무질서로 편입돼버린 그것을 주워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드물게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의치 않은 일이다.
세상의 모든 문학은 이 여의치 않은 시도 끝에 탄생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첫 장에는 얼른 의미를 알 수 없는 종알거림이 눈에 들어온다. “오, 그 파얀 잔니꼬 피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듣는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기억은 영아기에 가닿는다. 그 최초의 기억이 그이를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마침내 예술세계로의 비약으로 이끌 것이다. 작가는 한 예술가가 어떻게 재련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에피파니 기법을 사용했다. 내게도 그이와 다름없이 흘러넘치는 옛날이 존재하는데, 거기 접속해볼라치면 매번 같은 곳에 닿는다.
안간힘을 다해 그려낸 회화 속에서 나는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 삼베로 짠 바지와 러닝셔츠차림인 내 입가엔 끈적한 수박물이 묻어있지만 닦을 생각도 않고 담방담방 수면에 잠겨있다. 볕은 나무그늘을 투과하지 못하지만, 날벌레까지 막아낼 리는 없다. 할머니의 부채질은 어떤 선풍기보다 일정하게 그것들을 흩어주고 있어 무엇도 나의 잠을 방해하진 못한다. 그 한갓진 풍경이 어느 해의 여름날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나를 내려 보는 할머니의 얼굴에 내려앉은 비애를 미루어 그즈음이 적어도 내 아버지가 돌아간 후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최초의 기억에 접속하고자 하지만, 다섯 살 이전을 끄집어내는 데는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내 기준으로 마름질하면, 조이스의 저 유명한 도입부는 작가적 상상이 부려놓은 것이리라. 소설의 허구가 어떤 실체보다 진실을 선명하게 목격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까맣게 몰랐던 사람처럼 종종 억울해진다. 허구의 윤색으로도 조감되지 못하는 나의 더 오랜 옛날을 떠올리면 말이다. 내 딸아이도 언젠가 이즈음의 나처럼 최초의 기억에 접속하려 할 때, 접속 장애로 다섯 살 이전을 떠올릴 수 없으면 어찌할까. 이즈음의 저 말도 안 되는 투정들을 죄 잊어버리면 그 서운함은 어찌할까.
이 글을 쓰는 현재로부터 며칠 후면, 돌아간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보낸 시간보다 나는 딸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된다. 그렇게 또 새해를 맞는다. 무정한 자연물인 해를 보며 큰 소원을 품어본다. 아버지와 달리, 나는 남들 사는 만큼 살아 기억하지 못하는 딸아이의 옛날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비극이 올연한 세상에 이토록 죄스러운 바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