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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그까짓 거, 못 먹을 수도 있는 거죠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1-27 19:43:23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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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단골 밀면집에서 본 풍경이다. 옆 테이블에 고등학생쯤으로 되어 보이는 딸과 아버지가 앉았다. 속으로 ‘부녀가 함께 밀면집이라니, 참으로 부산다운 풍경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비빔밀면 곱빼기를, 딸은 물밀면을 주문했다. 모녀 사이를 일부러 훔쳐보려던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주문한 밀면이 나온 뒤 두 사람의 행동이 내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밀면이 나오자 아버지는 딸의 밀면 위에 있는 오이를 정성껏 걷어 주었다. 양념은 남기고 오이만 골라내는 아버지의 솜씨가 꽤 익숙해 보였다. 딸 역시 그런 아버지의 배려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오이가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음식일 수도 있다.
이 모습에 대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맛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아주 흐뭇한 풍경이었다. 오이를 먹지 못하는 건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일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오이를 먹지 못하는 이유는 특유의 쓴맛과 냄새 때문이다. 오이는 해충이나 초식동물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쿠쿠르비타신’이라는 살충 성분을 만들어 내는데 쿠쿠르비타신은 쓴맛을 낸다. 해충과 초식동물은 쓴맛을 매우 싫어하고 심지어 독으로 간주한다. 반면 대부분 쿠쿠르비타신의 쓴맛을 못 느끼거나 느껴도 불쾌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쓴맛을 감지하는 유전자인 ‘TAS2R38’이 유난히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쓴맛을 100~1000배 정도 강하게 느낀다. TAS2R38이 민감한 사람들에게 오이는 기분 나쁠 정도로 쓴맛을 내는 채소인 것이다.

냄새는 더욱 극단적이다. 오이의 향은 유난히 강하고 이 특유의 향 때문에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이의 향이 유난히 강한 것은 ‘노나디엔올’이라는 알코올성 물질 때문이다.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맹렬하게 인간의 후각을 자극한다. 인간의 후각 역시 유전적인 요인으로 수용체가 제 각각이다. 즉 향이라는 외부의 자극을 해석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대부분 노나디엔올의 향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일부는 이 향을 극단적인 비린내로 느낀다. 따라서 이들은 오이뿐만 아니라 오이비누의 향에조차 기겁한다. 미각과 후각 수용체 가운데 하나만 특이해도 불편한데 두 가지 수용체 모두가 오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들에게 오이는 정말 혐오스러운 채소가 되는 것이다.

딸의 밀면에 고명으로 올라간 오이를 걷어내는 아버지의 행동을 내가 흐뭇하게 바라본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인간에 따라서는 유전적인 이유로 특정 향이나 맛을 남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혹은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고 피해야 할 대상이다. 아버지는 딸이 오이를 거부하는 원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전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유를 제외한 모든 음식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를 ‘푸드 네오포비아(Food Neophobia)’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성장은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씩 극복하는 과정이다. 간혹 어떤 두려움은 평생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싸잡아 ‘편식’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내 아이가 어떤 음식을, 왜 거부하는지 세밀하게 살피는 것 또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안 먹는다고 억지로 먹이지 말자. 오이 그까짓 거, 못 먹는다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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