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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꽃, 그늘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9-25 19:13:55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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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은 한민족 민중미학의 핵심 원리를 ‘그늘’이라고 했다.

호남 쪽으로 가면 이제 많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귀명창이 많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급 예술감식가다. 자기가 소리는 못하지만 귀는 아주 발전된 사람, 들을 줄 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시장에서 구멍가게를 한다든지, 논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누가 아무네 사랑방에서 지리산에서 소리공부를 하고 내려온 소리꾼이 소리한다 하면 소주 한잔하고는 사랑방으로 간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조금 우스운 관객들이 모인다. 지리산에서 한 3년 젊은 놈이 피를 두 대접을 쏟았다느니, 세 대접을 쏟았다느니 남의 일이 자기 일인 양 안타깝게 얘기를 하고, 소리꾼은 이 정도면 내가 소리판에서 한번 입신양명할 때가 되었다 해서 거창한 무대에 서기 전에 아무네 사랑방에 간다는 것이다. 근데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열 명 정도의, 허름한 차림의 눈 감고 앉은 사람뿐이다. 소리가 다 끝나고 나서 소주 한잔하면서 “저 사람 그늘이 없어” 하면 그 소리꾼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시인이 귀명창들이 초년병 소리꾼의 소리를 다 듣고 나서 ‘그늘이 없어!’ 한마디 하며 끝난다는 얘기했을 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미학자는 그와 똑같은 경우 일본의 예술감식가들은 ‘하나가 나이데스!’라 한다고 귀띔해줬다. ‘꽃이 없다’란 뜻이다. 갖출 것 다 갖추고 온갖 기교를 다 동원하고 젖 먹던 힘까지 몽땅 쏟아붓는 데도 충족되지 않는 최후의 그 어떤 한 가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금척과 같은 그 무엇! 우리 민족의 경우 ‘그늘’에 해당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 즉 꽃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늘이 무엇인가? 살면서 생기는 산들은 다 현실 장애의 불만과 억압에서 발생하는 불만족에서 오는 것이다. 인생의 괴로움 배고픔 서러움 억울함 쓰라림, 이런 것들이 모두 천신만고인데, 이러한 삶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사람에게는 그늘이 형성되지 않는다. 대체로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 어려운 것을 피하는 자는 그늘하고는 관계없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에게 그늘이 생기는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천신만고를 정면으로 부딪쳐서 정면돌파하려는 자들이다. 그 정면돌파에는 저항도 있겠지만 안으로 받아들여 삭이는 절제, 참고 자기 분노를 누르고 절제하면서 승화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이것이 나온다. 바로 ‘시김새’다. 삭히는 태도 ‘시김새’, 판소리에서 주로 적용되는 패러다임이지만 우리 민중예술 전반을 지배하는 미적 핵심이다.

시김새는 어떻게 하나? 삭힘, 한, 억울한 마음, 연애에 실패했을 때의 그 쓰라림, 한을 받아들여서 튕기지 않고 쉽게 풀어버리지 않고 안으로 넣고 삭이는, 참아 누르고 눈물이 나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고, 이 동안에 무엇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아픔을 통과하지 않으면 시김새가 형성되지 않는다. 시김새는 자유로운 조절력을 뜻한다. 아무리 소리를 잘해도 시김새가 없는 소리는 쳐주지 않는 게 우리의 소리문화다. ‘그늘의 미학’이라 불리는 시김새, 삶의 쓸쓸함과 고통을 깊이 품은 소리. 그저 가락만 쫓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 밑바닥까지 울려주는 소리가 바로 시김새가 있는 소리다. 시김새라고 하는 그늘은 천신만고,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여서 어떻게든지 이겨내려고 애를 쓰는,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려 정직하게 애를 쓰는 사람 가운데 형성된다. 인생의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은, 안 겪은 사람이나 그때그때 잔꾀를 부리고 빠져나온 사람하고는 다르게 인생의 어려운 국면에 부딪혔을 때 일단 침착하게 정지해서 가만히 생각한 뒤 천천히 대응책을 강구하는 슬기로움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개 보통 때는 잘 모르는데 어려운 국면에 부딪히면 슬기롭고 그러면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천신만고의 그 독공, 그런 각고의 수련을 안 하면 그늘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그 그늘은 뭔가? 느낌이다. 환하면서도 침침하고 빛과 어둠이 같이 있고, 슬프면서도 기쁘고, 아주 이상한, 웃기면서 침통하고, 초자연적이면서도 자연적인 그런 그늘이 어쩌면 일본의 미적 핵심인 꽃과 다르게 우리의 미적 핵심이 돼 세계 속에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닐까.

이청산 백산안희제선생독립정신계승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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