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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휴식은 또 다른 형태의 집필 시간

  • 김은희 동화작가
  •  |   입력 : 2022-08-28 18:42:4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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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보름 동안 짐을 싸서 횡성에 있는 레지던스를 다녀왔다.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인이 운영하는 레지던스로 아름답고 고요했다. 본채와 별채로 나뉜 레지던스는 자작나무 가문비나무를 등지고 마당 앞에 내를 그림처럼 안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그네처럼 매달린 흔들의자는 내를 바라보고 앉을 수 있게 돼 있었다. 본채에 작가가 사용할 수 있는 방이 두 개 있었고, 별채는 독립형 작은 독채로 세 채가 자작나무 사이에 있었다.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동화작가가 글을 쓰기 좋은 곳이 있다며 ‘예버덩 문학의 집’이라는 너무나 문학적인 이름을 가진 레지던스를 추천했다. 나는 내향형에 집순이라 망설였다. 그곳에서 장편 동화 한 편을 완성했다는 동화작가의 말에 고민의 마침표를 찍었다.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보내야 할 원고를 써서 보내고 장편 동화를 완성해서 나오리라 다짐하며 짐을 쌌다. ‘예버덩 문학의 집’에서 처음 느낀 감정은 ‘좋다’였다. 자작나무를 등지고 있는 별채 끝 방갈로가 내가 머무를 곳이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그때 입 밖으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유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 온전한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유폐’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를 알았다. 이불을 깔고 누워 조용히 나를 주시하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돼서야 설핏 잠이 들었다.

투다닥. 투둑. 무엇인가 방갈로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커튼을 열자 베란다에 놓여있는 의자에 청설모가 앉아 있었다. 마치 주인인 양 느긋하게 의자에 고인 물을 마시고 사라졌다. 일찍 눈을 뜬 김에 산책하기로 했다. 밖은 초여름인데도 한여름처럼 더웠다. 문학의 집을 빠져나오자 배추밭이 펼쳐졌다. 수확이 한창이었다. 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사람들은 동남아계였다. 본격적인 밭일을 앞두고 길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무리 중 여자가 나를 보고 웃으며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밥 먹고 가요. 같이 밥 먹어요. 맛있어요.”

새벽부터 땀을 비처럼 쏟으며 배추를 걷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한가롭게 풍경을 즐기며 산책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해 산책을 그만두고 되돌아왔다. 산책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결심은 지우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른 작가들은 모두 열심히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텃밭을 일구며 소설을 쓰는 소설가도 있었고, 소설을 편집하고, 완성하고, 희곡을 쓰며 자료를 수집하는 작가도 있었다. 나는 조금씩 쓰고 썼던 글을 지우는 작업을 반복하며 대부분 시간은 그냥 앉아 있었다. 책상 앞에 그냥, 마당 흔들의자에 그냥, 도서관 창 옆에 그냥 사물처럼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냥 앉아 있는 시간 동안 비가 내렸고, 내가 사납게 흘렀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감겼다.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게 흘러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됐고 장편 동화를 쓰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졌다.

‘그냥’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아니었음을 집에 돌아와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집에 돌아와서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시간이 나에게 글이 돼 돌아왔다. 하는 일 없이 거닐다 도서관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생각하며 써놓았던 메모가 글이 됐다. 그렇게 쓰게 된 장편 동화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다.

마무리를 앞두고 문득 ‘불편한 편의점’에서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글을 쓰지 못해 초조해하는 희곡작가에게 선배 작가가 한 말 중에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 문학관에 입주한 작가들에 관해 말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여기 작가들은 글을 안 쓰고 어슬렁대는 것 같아도 그게 다 집필 행위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작가도 비울 건 비우고 작품 생각하며 시간 보내요. 생각 없이 쓰면 타이핑이지 집필이 아니잖아요.” 나에게 ‘그냥’이란 시간이 또 다른 집필의 시간이었다.

김은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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