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어지러운 사회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잠시라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해 나름의 여러 가지 힐링 방법을 모색해볼 때가 있다. 요즘 ‘불멍’ ‘물멍’‘비멍’‘바멍(바다멍)’ ‘뷰멍’ 등 일종의 ‘멍’ 시리즈 스트레스 해소법이 다양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어느 날 외출했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 방에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는 방법으로 어둠멍을 즐긴 적이 있다. 그럴 때 어둠은 온종일 소음과 불빛에 시달린 나를 어둠 속 무념무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까맣게 밤이 익어 갈수록 무시로 여러 개의 생각의 방들이 문을 열어젖힌다. 내 안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이 떠나려 할 때 앓았던 불안증이 무시로 나에게로 출몰했다가 사라진다. 나는 어둠에 깊이 몸을 담그고 이런 생각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러면 어둠은 어긋났던 내 생각들을 하나씩 비워내면서 나를 내 안의 작고 투명한 세계로 초대한다. 이럴 때 어둠은 소란스럽던 불빛과 온갖 기억을 지워주는 요술지우개가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요즘 어둠멍을 ‘불멍’이나 ‘물멍’처럼 두 글자로 줄여서 ‘둠멍’이라고 부르곤 한다. ‘둠멍’이라는 말은 입술 속에 넣어 음미해볼수록 친근한 정감이 느껴진다. 때때로 새로운 말은 시를 불러온다. 이런 과정에서 최근 ‘둠멍’이라는 시가 내게로 왔다.

‘둠멍’이라는 말 들어본 적이 있나요 ‘불멍’이나 ‘물멍’처럼 내가 붙인 이름이에요/나는 어제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둠이 피곤한 나를 만지더니 욱신거리던 내 몸의 소음을 걷어갔어요/정말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어젯밤 어둠이 내 피곤을 삼켜버렸어요//그때부터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어요/어둠은 언제나 묵직하게 흐르면서 작은 파동으로 흔들렸어요/때로는 어둠의 파동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나를 껴안았어요//어둠은 내 작은 방과 벽,/내 몸의 미세한 균열까지도 서슴없이 지워버리는 습성이 있어요//다정한 것은 오래도록 곁에 두어야 한다잖아요/나는 오늘부터 둠멍에게 내 안의 멍들을 맡길 예정이에요/우리가 숙면을 해서 몸이 개운해지는 것도 일종의 둠멍이라는 걸 알았어요 -졸시, ‘둠멍’ 전문.

그런데 둠멍은 한적한 시골마을 여행길에서 더욱 특별해진다. 고층건물과 밤새 돌아가는 불빛을 벗어난 시골 마을에는 깊은 밤, 모든 불빛이 소등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밤에 운전하다 한적한 시골길을 만나면 도로 한쪽에 잠시 주차하고 라이트를 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 쏟아지는 환상을 경험한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하늘의 별이 반짝이며 내려오고 풀벌레 소리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럴 때 빛의 찌꺼기, 소리의 찌꺼기들을 어둠이 스펀지처럼 모두 빨아들여서 내 몸을 정화시키는 기분이 든다.

그때 문득 나는 내가 둠멍과 별멍과 풀멍 삼종세트를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밤을 새워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어쩌면 물멍과 둠멍을 함께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낚시가 꼭 물고기를 낚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면 위에 떠 있는 찌를 바라보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홀릭에 들게 되는 것이다.

‘멍때리기’는 일종의 덜어냄의 과정이다. 둠멍에 한 번 빠져들면 마음까지 소등되고 초기화된다. 모든 입체적인 사물이 평면이 되고 새로운 깨달음의 순간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정보 과잉, 소통 과잉으로 인해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는 잠시 생각을 로그아웃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말에 한번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 한적한 어둠에 자신의 멍들었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겨볼 것을 권한다. 멍으로 멍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은 일상에 지쳐있던 나에게 새로운 유레카였다. 그동안 ‘멍’이라는 글자는 내게 부정적으로 다가왔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모든‘멍’ 속에 숨어있던 긍정의 힘을 느낀다.

박재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