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9일 새벽. 부산역의 모습은 아비규환 같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서울역에서 출발하지 못한 피란열차는 6월 28일 저녁 대전에서 피란민 500여 명을 싣고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했다는 안도와 막막함도 잠시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우리 아이가 없어요…누가 우리 아이 쫌 찾아 주세요…금순아, 금순아.” 그렇게 피란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부산역은 아비규환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부산은 가장 안전한 도시였고 삶을 위한 분주함과 아우성이 그치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피란수도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피란수도’라는 말은 낯선 표현처럼 들리기도 한다. 서울 중심의 사고와 기간 중심의 사고인지는 몰라도 임시수도라는 표현에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울러 ‘피란’인지 ‘피난’인지 용어에서도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우선 용어부터 본다면 ‘피난(避難)’과 ‘피란(避亂)’은 사전적 정의와 한자의 의미도 다르다. 피난은 ‘어려움’을, 피란은 ‘난(전쟁)’을 피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상황을 피하는 것이 ‘피난’이고 전쟁이나 화재, 재앙 등의 특수한 상황을 피하는 것은 ‘피란’인 것이다.
‘임시’수도였던 대전, 대구와 달리 부산의 시간은 아주 길었다. 입법·사법·행정의 3권 기능을 가진 국가기관도, 교육·의료·문화 등의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도 모두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정부청사는 경남도청(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보건부와 문교부, 사회부 등은 옛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 광복점)에, 사법부는 (구)부산지방법원(현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 자리를 잡았다. 국회 역시 처음에는 부산극장을, 나중에는 경남도청 체육관(무덕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대청로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 지역에는 피란 정부의 나머지 기관들이 들어섰고 학교와 단체들도 틈만 있다면 들어와 부산은 작은 대한민국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수도, 피란수도가 되었다. 거기에 유엔기구 및 각국의 대사관이 들어왔고 해외 원조물자와 인력이 드나들면서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문학과 예술인들에게는 작은 창작활동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의 도시가 되었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45년 28만 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49년 47만 명, 51년 84만 명이 되었고 1955년에 100만 명을 넘겼다. 부산은 인구 과포화에 직면하였고 각 지의 피란민 수용소는 금세 차버렸다. 도심 주변의 산과 경사지, 하천 변에는 판잣집과 움집이 빼곡했다. 판자부스러기가 고마웠고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이 고마웠다. 지붕 같지 않은 지붕에는 종이박스에 기름(콜타르)을 바른 루핑지를 얹고 통조림 깡통을 펴 얹기도 했다. 2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한 가족이 생활했고 화재의 위험을 견디고 물도 화장실도 없는 공간에서 위생은 생각지도 못한 채 질병과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식수 식량 추위 모든 것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부산은 전쟁을 피해 찾아온 안도적 공간이었지만 안도적 삶을 살기 어려웠던 역설적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고통과 혼란의 도시 부산에도 희망은 존재했다. 원주민들은 ‘한 방 비워주기’ 운동 등을 통해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고 피란민들은 국제시장과 부두에서 날품팔이로 자식들과 희망을 키우며 삶을 이어 나갔다.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융합되고 원주민과 피란민이 하나 되는 멜팅팟, 부산문화와 피란문화가 만나는 멜팅팟,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하나 되고 인종과 문화가 하나 되는 뜨거운 ‘용광로’가 되었다. 임시수도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부르기엔 그 의미와 역할이 너무나도 큰 ‘피란수도 부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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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피란수도 부산’을 등재하기 위한 노력들이 뒤따르고 있다. 부산시는 다양한 시민 아카데미를 열고 ‘피란수도 부산 문화재야행’ 등의 행사를 매년 개최하면서 피란수도 부산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은 조건부지만 임시수도대통령관저(경무대), 임시수도정부청사(임시중앙청), 근대역사관(미국대사관), 부산지방기상청(국립중앙관상대), 부산항제1부두, UN기념공원, 부산시민공원(하야리아기지), 아미동비석문화마을, 우암동소막마을 등 9개의 피란수도 유산이 문화재청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여전히 많은 준비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피란수도 부산’의 의미를 알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부산인으로서 자부심이 가득해지고 가슴마저 떨려온다. 결코 현란할 수 없었던 피란수도 1023일. 피란수도 부산의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던 삶의 의지와 희망, 그리고 정은 부산의 무의식이 되고 도시 부산의 정체성이 되고 부산사람의 기질이 되어 타 도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부산다움’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번 주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 다른 부산, ‘피란수도 부산’ 속으로 한번 떠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