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청년의 소리] 트라우마를 용인하는 교육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6-14 19:03:06
  •  |   본지 21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초등학교 3학년이었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영어학원을 가게 됐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영어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도 원어민 수업이 처음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여러 매체에서 어릴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런 환경에서 어머니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영어를 배우길 바라며 학원에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만 말해서, 그 학원은 나에게 최악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알아본 학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초등학교 저학년 반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6학년 반과 중학생 반을 오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물론 ‘수업을 들어야 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 수업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혼자 다른 책을 가지고 공부했고, 교실 구석진 자리에서 단어를 외우거나 문제를 풀었다. 애초에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으니 외우지 못하면 맞고, 혼나는 일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었던 건, 혼자 수업에서 배제되어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던 그 공간의 분위기였다.

성격이 썩 얌전하지 않았던 나는, 그 숨 막히는 학원 수업을 자주 빠졌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면 집에서 자는 척을 하거나, 아예 작정하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난리를 치는 것에 반해 영어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는 기미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학원이라면 치를 떨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항상 교실에 남거나 도서관에 가서 혼자 공부했다.

그런데 또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복도로 쫓겨나 문제를 다 풀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어야 했던 수학 학원이나, 손가락을 때리고 윽박지르며 수업하던 피아노 학원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오히려 즐겁게 공부를 해본 경험이 드물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느낀 경험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공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더 충격적인 건 우리가 그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학부모도,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학원 관계자도, 심지어 이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했던 당사자마저도, 그런 방식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성과’일 것이다. 어쨌든 성적이 올랐으니까, 어쨌든 공부를 하게 되니까, 어쨌든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을 붙잡아 둘 수 있게 되니까, 하나라도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따위가 아니라, ‘당장의 성과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폭력도 용납하는 기이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싶다. 만약 어린 시절 내 영어성적이 올랐다면, 나는 좋든 싫든 그 학원을 계속 다녔을 것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스스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최근 나는 영어학원을 다닐까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학원이 싫다면서 왜?’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철이 들었거나 늦게나마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비로소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비용을 지불하고 학원에 갔을 때, 누구도 그를 수업에서 배제하거나 복도로 쫓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적 폭력을 행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교육과 인권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바로 그런 지점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누군가를 특별하고 귀하게 여기자는 이야기를 넘어서, 오히려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얼마나 침해당하고 있는지, 반대로 우리는 그런 당연함을 어떻게 용인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참지 못해 도망간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부조리를 꾹 참아낸 이들을 위해서도 그렇다. 누군가의 학문적 성취가, 개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기묘한 보상심리로 귀결되지 않도록 말이다.

허태준 작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100억대 체임 국제신문 대주주, 국감 증인 채택
  2. 2실속 없는 ‘국제기구 인증’ 혈세 붓는 기초단체
  3. 3부산 전셋집 1년새 11%↓…매물가뭄 심화에 세입자 울상
  4. 4[사설] 외국인 400만 시대, 부산은 이제 체류형 관광이다
  5. 5‘부캉이’는 무태상어 아닌 흑상어…수과원 근접영상 분석 최종 확인(종합)
  6. 6‘경영난’ 태종대 집와이어 재개장…이용료 1만 원 낮췄다
  7. 7센텀2지구 속도전…풍산 이전지 주민 경청·토지보상 착수
  8. 8부캉이 떠나도 북항 북적이려면…“원도심 접근성 개선을”
  9. 9기장군수실 1층 이전 ‘없던 일로’
  10. 10매표소 오픈런…레드카펫 ★ 보려 외국인 새벽부터 달려왔다
  1. 1100억대 체임 국제신문 대주주, 국감 증인 채택
  2. 2조희대 “국회·대통령의 제청 간섭은 위헌”(종합)
  3. 3송곳검증 벼르더니…교통·시설公도 싱거웠던 시의회 청문회
  4. 4여야, 국감서 알래스카 LNG 사업 집중 추궁
  5. 5연일 노무현 때리는 한동훈, 박정희 띄우는 주진우…檢 출신들 속내는
  6. 6이 대통령 "북극항로 시범운항 선박 귀항 부산의 미래 깃발, 신경써달라"
  7. 7‘맹탕 청문’ 의식 부산시의회, 교통·시설公 송곳검증 벼른다
  8. 8부산 민주당 "주진우, 암살자(들) 부산영상위 시사회 사실왜곡 비판"
  9. 9[속보]조희대 작심 발언 “국회·대통령은 대법원장 제청에 관여 못 해”
  10. 10검찰개혁, 중수청장 임명 두고 커지는 집안싸움
  1. 1부산 전셋집 1년새 11%↓…매물가뭄 심화에 세입자 울상
  2. 2‘부캉이’는 무태상어 아닌 흑상어…수과원 근접영상 분석 최종 확인(종합)
  3. 3센텀2지구 속도전…풍산 이전지 주민 경청·토지보상 착수
  4. 4롯데백화점, 업계 첫 외국인 매출 1조 ‘포문’
  5. 5금감원 “AI 해킹 시도 IP 28개 확인”
  6. 6부산 극지해양 전문강사 “현장 능력 키워요”
  7. 7부산 청년기업 ‘DPP(디지털제품여권)’ 국내 첫 상용화
  8. 8주가지수- 2026년 10월 6일
  9. 9보스턴다이내믹스, 글로벌 AI 전문가 CEO로 영입
  10. 10부산 아파트 매매 침체일로…해운대·수영·동래만 웃었다
  1. 1실속 없는 ‘국제기구 인증’ 혈세 붓는 기초단체
  2. 2‘경영난’ 태종대 집와이어 재개장…이용료 1만 원 낮췄다
  3. 3부캉이 떠나도 북항 북적이려면…“원도심 접근성 개선을”
  4. 4기장군수실 1층 이전 ‘없던 일로’
  5. 5전기車 높아진 인기에 예산 동나…부산시, 하반기 1520대 더 지원
  6. 6전재수 시장, 소통 행보…사흘 연속 생중계 회의(종합)
  7. 7부산중수청장 “정치 중립성·수사 독립성 엄격히 지키겠다”
  8. 8양산시보건소 일반진료 줄인다
  9. 9“침묵하는 대주주, 대화 자리 나서라”
  10. 10박완수 경남도지사 “행정통합 위해 부울 시장 설득”
  1. 1롯데, 6위 탈환 사활…3위 싸움 변수로
  2. 2김도영 굳히기냐, 힐리어드·오스틴 뒤집기냐
  3. 3조코비치, 올 첫 우승 눈앞
  4. 4장애인AG 결단식…“金 21개 이상 목표”
  5. 5가을은 놓쳤지만…거인 ‘레·황(레이예스·황성빈)’ 도전은 계속된다
  6. 6“감독님이 먹으라고” 정수진, 내막 폭로…유도회 “선수관리·운영체계 점검” 사과
  7. 7불안한 모레노호 우즈벡전 반등할까
  8. 8레이예스 200안타 달성에도…롯데, 두산에 4안타 그치며 패배
  9. 9‘손흥민 A매치 한국인 최다 골’ 우즈베키스탄에 2-0 완승
  10. 10아시안게임 폐막…한국 金 39개, 44년 만에 최소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원자력 청출어람, 스승을 가르치다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국제칼럼 [전체보기]
누구도 법 앞에 국민보다 ‘더 평등’할 수 없다
배지의 실력행사
기고 [전체보기]
전문대학을 소개합니다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통행료 면제 명암
논란의 AG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급여’ 맞춰야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외국인 400만 시대, 부산은 이제 체류형 관광이다
삼권분립 훼손하는 정파적 국감 안 된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부자(富者)가 되고 싶다면
드골 대통령과 군복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무(武)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