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 사랑받아보지 못 한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대작가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의 기본 전제다. 자기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굶주리는 조카들 갖다주려고 빵을 훔치려 했던 장발장은 감옥에 오랜 세월 갇혔다 풀려나는데, 뮈리엘 신부의 은 식기를 훔쳤다가 용서받고 사랑받는 체험을 한 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어리고 불우한 코제트의 손을 잡아주고 가족이 된다. 이 사랑의 장면에서 ‘레 미제라블’의 모든 것이 비롯된다.
철저하고 강하고 성실했으나, 가난한 범법자였던 부모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낳는 바람에 사랑받을 틈이 없어 사랑을 모르고 차갑게 자란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의 사랑 세계에 가로막혀 결국 자살한다.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결혼하고, 혁명은 승리한다. 이 모든 게 사랑 덕분이다. 사랑에 빠졌거나 사랑을 하게 된 사람이 반드시 배우게 되는 덕목이 있다. 자존(自尊)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함부로 대하거나 방치하지 않는다. 품격을 지키며 자신을 아낀다.
재미동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사랑의 서사다. 사랑과 자존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중요한 인물은 사랑하면서 자존을 지킨다. 한국 근현대를 다룬 소설을 읽다 보면, 일제강점기·독재시절·경제성장기에 가난한 패배자로 살아가는 남편 또는 아빠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들을 끝없이 때리고, 자존감이 없어 자신과 가족을 학대한다. 나는 이런 장면이 지겨웠다. 왜 이렇게 때리고 학대하고 무너지는가? 왜 서로 사랑하면 안 되나?
훈이는 가난하고 신체장애와 병이 있으며 외모는 볼품없고 사회적 지위는 낮다. 내세울 게 없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얻은 딸 선자를 깊이 사랑한다. 선자를 사랑하는 그는 지혜롭고 자존감이 선명하다. 선자의 엄마인 양진은 어떤가? 선자를 지극정성으로 위하고 사랑한다. 영도에서 영세한 여관을 운영하는 양진은 선자가 여관 일을 돕게 하지만, 품격과 사랑을 지킨다. 훈이와 양진이 자녀를 때리는 장면은 한 번도 안 나온다. 부자와 지배자들이 가진, 가난한 백성은 무식하고 난폭하다는 기괴한 선입견을 이 소설은 통쾌하게 파괴한다.
선자를 사랑한 남자 고한수의 사랑 또한 진짜다. 고한수는 품격을 잃지 않는다. 부자 고한수가 가난한 선자를 멋대로 데리고 놀다 싫증나자 버리는 식의 전개가 전혀 아니다. 고한수는 선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랑 때문일 것이다. 선자는 어떤가? 사랑 속에 자란 선자는 자존을 지킨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오사카에 정착한 선자를 고한수가 도우려 하나 한사코 거절하는 것도 자존감 때문이다.그러니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작가는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지배자들이 세상을 주무르고 주물러서 역사와 민중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고 하는데, 상관없다. 우리(민중·백성)는 서로 사랑하고 자존을 지키면서 살아왔고 살아냈고 여기까지 왔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고? 상관없다! ‘파친코’는 사랑과 자존의 소설이다.
바로 이런 시점에 눈여겨봐야 할 장편소설이 또 한 편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재일동포 작가 김창생이 쓴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부산의 봄출판사 펴냄)다. ‘바람 목소리’와 ‘파친코’에는 비슷한 점도 있어 두 소설을 잇따라 읽으며 친근감을 느꼈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바람 목소리’는 1948년께 제주 4·3 때 제주에서 시작한다. 재일동포 2세인 작가 김창생은 1951년 일본 오사카 이카이노(한민족 밀집 지역)에서 태어났다. 두 소설에는 이카이노 모습과 재일동포 삶이 실감나게 펼쳐진다.
김창생의 ‘바람 목소리’는 탁월한 형상력과 문학성을 보여준다. 김창생 작가는 2010년 자기 근원을 찾고자 자기 존재의 뿌리가 있는 제주도로 영구 귀국했다. 쌍둥이 설아와 동아가 제주 4·3 광풍 속에 일본 오사카로 몸을 피한 뒤 그곳에서 삶을 시작하고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바람 목소리’는 생생하게 담았다. 제주 4·3이 제주 사람 삶에서 갖는 의미를 표현한 점도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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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에디터 겸 기획탐사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