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 막바지에 지인들과 차 한잔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지지자의 득표를 위해 전화하려고 주소록을 들여다보니,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누군가는 ‘사람 좀 다양하게 사귀면서 살자’고 했다. 이런 얘기를 여기저기 해보니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전화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해도 소용없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과 조건반사 때문이 아닐까.

이와 같은 양상은 대선 후보와 정책, 정당에 대한 호불호, 일본의 역사왜곡과 역사교과서 서술에 대한 대응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우려는 아주 오래전 고 이영희 선생이 ‘조건반사의 토끼’에서 지적한 바 있다.

시민은 코로나와 대선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제20대 대선의 시대정신은 ‘공정’과 ‘통합’이라 한다. 이번 대선에서 후보들의 ‘미래비전과 프로세스’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됐는지 의문이다. 다음 달이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시민의 반응도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기대와 희망을 넘어 우쭐해하기도 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우려와 비난을 넘어 싸늘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우리 사회는 선거를 거듭할수록 분열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분열은 자칫하면 치유불능 상태에 빠질 소지가 있다. 박빙의 차이라 그런지 이번 대선 후유증이 더욱 심한 것 같다. 정권을 주고받으면서 지지 인물과 정당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고, 선거과정에서 생성된 불신과 반목은 후보와 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적대적으로까지 치닫는다. 타인에게 관대하고 본인에겐 엄격해야 한다지만, 선거판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대 후보와 그 지지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대선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민심을 갈랐으면, 대선 후 이른 시간 내에 통합이든 봉합이든 실질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선거과정에서 제기된 별의별 의혹이 선거가 끝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다. 정상국가라면 선거과정에서 제기된 핵심 의혹은 선거 후 적법절차에 따라 신속하게 조사해서 낱낱이 밝혀, 시민의 의구심을 제대로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범죄구성 요건이 충족되면 누구든 예외 없이 의법처리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악화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공정과 통합’이라는 시대정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비례의 원칙’하에 동일한 사안에 대해 같은 기준과 잣대를 적용해야 하고, 사회적 합의와 공감을 얻어내는 과정을 생략하면 안 된다. 종종 이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에 오만과 독선에 빠져,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로 비판받는다.

스테레오타입과 조건반사는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과 교과서 서술이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기시다 내각의 첫 외교청서에는 ‘독도는 일본 땅’,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는 한국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특정언론에서 ‘한국 정권교체기에 역사지우기 열 올리는 일본, 교과서 강제연행 삭제’라는 기사제목으로 잘 알 수 있다.

새 정부의 한일관계의 기본방향은 ‘이번엔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관계 푼다’, ‘한일 협력관계 회복에 방점…정진석 “첫 단추 끼우는 심정”’, ‘윤석열 정부, 對日 외교에 긴 호흡 필요’ 등의 언론보도를 통해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출구전략을 마련하느라 고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과거사 문제에 대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23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가운데 군함도 등 7곳은 강제동원된 장소와 겹친다.

이 등재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일부 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강제동원됐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2021년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약속한 등재 후속조치를 하지 않은 데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 충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올해도 강제동원지 가운에 하나인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가 국내에 알려졌다. 이에 정부는 TF를 조직해 대응하고 있다. 늘 두어 박자 늦은 대응 또한 스테레오타입과 조건반사에 기초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양상은 대선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남북관계, 대미관계, 한일관계 등 거의 전 영역에서 만연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아니 오래전부터 우리는 에릭 홉스봄이 말한 여러 시대와는 또 다른 창의성이 부재한 ‘반사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