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겨울 끝자락을 봄의 시작에 이어 붙이더니, 매화와 산수유는 이내 봄을 틔웠다. 그리고 어느새 봄바람에 흩날리던 벚꽃마저 절정의 봄볕에 녹아버렸다.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상투적 계절 인사로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변하는 것 즉 유한함이 가지는 의미 혹은 가치에 관한 생각을 풀어보고자 가는 봄에 대한 아쉬움을 글 위에 먼저 얹었다.

변화와 변하지 않는 상반된 속성을 함께 가진 것이 있다. 변함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그러하다. 계절의 변화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다시 찾아올 봄을 보내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매우 짧은 시간 즉, 순간순간이 앞으로 펼쳐질 긴 시간보다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봄이 일생에 단 한 번만 주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계절이 반복되지 않고 단 한 번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각각의 계절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려 할 것이고 또 그 계절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네 인생은 사계절과 많이 닮았다.

얼마 전 봄볕 가득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촌로의 모습을 보고, 내 마음대로 그의 생각을 짐작해본 적이 있다. 계절의 봄날과 인생의 봄날, 지금 그는 어느 봄날을 회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장면에 어울릴 법한 단가 한 소절이 떠올랐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라…”

긴 시간을 노래하는 판소리 공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짧은 곡을 노래하는데 이를 ‘단가’라고 한다. 위 노랫말은 단가 중 ‘사철가’의 앞부분이다. 노래 시작 부분의 가사를 따서 ‘이산 저산’이라는 곡명으로도 칭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대한 회화적 묘사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인생에 빗대어 표현한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기가 막힌다. 이 가사를 듣고 있자면 백발노인의 지혜가 느껴진다.

“인간이 모두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허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생전의 일배주만도 못허느니라.”

지낸 세월 속에서 지식을 지혜로 바꾼 경험자가 이야기한다. ‘사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노래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래도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내 자신에게 읊조리는 훈계이자 타인에게 이르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걷고 있다. 불로불사의 약과 병마용으로 이를 부정하려던 진시황이 ‘사철가’를 들었다면 한정된 인생에서 조금 더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무한한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자 시간의 유한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한함을 잃는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 또한 잃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한한 반복으로 존재할 테니 말이다. 유한함과 희소성 안에서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한번은 판소리 공연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흥보가 중 ‘박 타는 대목’에는 흥부네 가족이 곯은 배를 채워보고자 박을 타던 중, 박에서 나온 쌀과 돈에 쓰인 ‘취지무궁지미(取之無窮之米·먹어도 줄지 않는 쌀), 용지불갈지전(用之不渴之錢·써도 줄지 않는 돈)’이라는 글을 보고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흥부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 거기에서 나온 무한한 삶의 재화는 과연 흥부와 그의 가족을 끝까지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변하는 것들은 한정된 시간만큼만 우리와 함께 머문다. 변함이 없는 것들은 무한한 시간의 영속성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삶이, 생명이 한정되어 있기에 허락된 만큼만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는 계절에서, 끝이 정해진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추구한다. 아! 가는 봄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