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서운 건 실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찮은 건 헛말·헛글 때문이다. 사람이 중한 건 시대가 삶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같잖은 건 자기만 삶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월급의 무게에 눌렸다. 불행했다. 명함 든 손을 내밀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허덕이며 불행과 부끄러움을 곱씹었다. 울었다. 그러나 마음이 꺾이진 않았다. 23년이었다. 불행과 부끄러움을 녹이기 위해 책을 읽었다. 여전한 불행과 부끄러움이었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불빛은 깜빡였다.

단추와 단추 사이로 살이 삐어져 나오는 옷을 벗었다. ‘잊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50년 방황 끝에 만난 일이었다. 출판사 슬로건을 지었다. ‘우리는 환대하고 발견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탁월함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쾌하며 솔직하고 우아하다’.

“돈 되나?” 친구가 물었다.

“??????” 내가 답했다.

“돈 안 되는 일 쫌 그만해라.” 친구가 말했다. “돈 안 돼도 개안타.” 내가 답했다.

책을 만드는 일은 귀한 일이다. 시대와 삶과 사유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교정·교열은 반복이다. 윤문은 글에 윤기를 넣는 일이다. 잘할 수 있기에 섬세하게 작업한다. 표지 디자인은 신난다. 고민과 갈등의 시간이 깊어진 어느 순간 짠- 하고 생각이 솟아난다. 책 만드는 전체 과정은 창조다. 고통은 즐거움 안에 있다. 책을 만들면서 더 좋은 사람이 돼가는 나를 인식한다. ‘토끼와 빨래’(임규찬 저)의 61개 에피소드는 다음 한 문장을 향해 달려간다. ‘어쩌면 주위를 좋은 사람으로 채우는 것,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나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삶이 글을 쫓아간다.

‘밤이 깔렸다’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앞뒤 표지 안을 그림과 글로 채웠다. 본문으로 직행했다. 차례를 마지막 쪽에 넣었다. 책을 만드는 전(全) 과정이, 마음이 생기는 만남(性)이 되었다. 예술이 되었다.

나림 이병주를 조명하는 시리즈의 첫 번째, 10편의 소설, 해설·줄거리·어록, 형법학자가 본 나림 이병주 소설의 재발견, 강력한 현재성, 소설 속 문장으로 줄거리 구성, 10편을 감상하는 기쁨, 명문장, 삶의 통찰과 지혜가 담긴 나림의 육성, 글쓰기 공부에 도움, 인문의 향연.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읽고 필사하는 일은 밤하늘 별을 헤아리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무모한 일을 시작했다.” -‘밤이 깔렸다’

“살다 보면 밤이 깔립니다. 밤이 깔렸지만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잘 살아야 합니다. 밤이 깔린 시대를 거침없이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에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이제 위대하고 거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림 이병주는 다시 나오기 힘든 작가입니다. 잊힐 수 없는 작가입니다. 삶의 애환과 운명의 얄궂음에 대한 방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이병주라는 거대한 산맥의 작은 골짜기 하나를 탐색했습니다. 바로 이병주의 법사상입니다. 소설 속 법사상에는 현재성이 있습니다. 법과 법률은 여전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깔렸다’는 형법학자(하태영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새긴 나림 이병주의 법과 문학 그리고 삶입니다. 문장의 향연입니다. 밤이 깔렸습니다. 나림 이병주를 만나야 합니다.” -‘밤이 깔렸다’

“다시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잡혀 등에 바늘을 꽂히우고 곤충표본함에 엎드려 있는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간악한 날짐승을 피하고, 맹랑한 네발짐승도 피하고, 전기가 통한 전선에도 앉지 않을 것이고, 조심스레 꽃과 꽃 사이를 날아 수백수천의 알을 낳을 것이다.” -‘소설·알렉산드리아’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

갑갑한 불안·막막한 외로움·불행한 공기. 밤이 깔렸다. 살다 보면 밤도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