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은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저 대통령 한 명 뽑는 일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에는 사안의 무게가 너무 막중하다. 국민 개개인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어서 선거에 그리 적극 참여했으니 이제 다수 국민의 뜻을 받들면 될 일이라고 형식적으로 논평하기에는 그 국민의 뜻이 너무 문제적이다. 지금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더 노력하자’는 불굴의 다짐이 아니라 대선 결과의 의미에 대한 냉정한 진단일 것이다.

국민 다수는 표로 분명히 말했다. 나는 사회 정의니 개혁이니 하는 구호들이 그렇게 달갑지 않다. 어차피 모든 게 제 밥그릇 챙기는 수단일 뿐이다. 그냥 각자 능력대로 사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이러한 생각은 냉철한 현실주의라기보다는 정치적 허무주의에 가깝다. 잘난 사람은 잘살고, 못난 사람은 못사는 게 ‘공정’이라면 대체 정치의 역할은 무엇인가? 못난 사람이 잘 살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인가? 만약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찰력이나 법정일 것이다. 못난이들의 아우성을 공권력으로 차단해야 될 테니 말이다.

공화국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이념인 ‘공화주의’는 공화국의 ‘시민’이 ‘공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개인의 발전과 자유도 떳떳하게 구가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공화국의 시민은 조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침략자에 맞서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전우이자 공동체의 앞날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의에 함께 저항하는 민주 동지다. 서양 문명에서 발원한 공화주의의 이상은 이제는 너무 고식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를 지탱하려면, 아니 적어도 공화국이라는 이름값을 유지하려면 최소한도의 공화주의는 필요하다. 구성원들 간에 일말의 자발적인 헌신도 없고 서로의 헌신성을 믿지 못한 채 각자가 이해득실만을 따지는 나라라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체제 유지가 필요하다면, 과연 주주총회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언제 ‘공화국’이라는 대의에 대해 합의한 적이 있었는지 별로 확실치 않다. 형식적인 명칭이야 오래되었지만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결의는 대단했지만 공화국의 가치에 대한 논의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치열한 민주화 투쟁이 있었지만 민주공화국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선진조국’ ‘대한민국’의 구호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마도 ‘촛불’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으로 상징화된 거리에서의 외침은 뒤늦게나마 공화국의 정치적 이념을 되새겨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광장의 목소리는 우리가 사는 공화국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물었다는 점에서 이전 민주화 투쟁과는 결이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아쉽게도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가 되어버렸다. 곧 해묵은 냉전적 사고에 길든 사람들이 광장을 접수했고 이념이 아니라 혐오가 공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촛불 정부’는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며 수량화된 여론의 추이에 따라 오락가락하다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매우 뒤늦게 찾아온 민주공화국 건설의 유일무이한 호기를 날려버렸다.

남은 것은 법적으로 공인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뿐이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여, 삶의 나락으로 뛰어들 채비를 서둘라. 마음만 비우면 그곳에도 행복이 있다!

소위 ‘진보’ 세력은 어차피 공화국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공화국이란 그저 기존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정치적, 법률적 장치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죄를 범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응당한 처벌을 받으며 능력이 없어도 사람 대접받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상식이 지켜지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들의 숭고한 이념이 온전히 실현되는 상태를 말한다. 노동해방, 여성해방, 탄소중립이 실현되지 않는 한, 유전무죄의 사회이거나 말거나 어차피 오십보백보이다.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면 어차피 요지경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숭고한 이념의 실현’은 이념이 아예 제거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기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을 바라보면 왠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문학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년에 쓴 에세이 ‘전부 혹은 전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는 평생 셰익스피어를 동경했다고 한다.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작품을 꿈꾸는 것처럼 세상을 꿈꾸어왔습니다. 나의 셰익스피어시여, 내 꿈속의 형상 중 당신이, 나처럼 다수이면서 누구도 아닌 당신이 있습니다.” 공화국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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