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국 미국 싱가포르 네덜란드 등 해양국가는 항만을 국가발전정책으로 활용해 국민경제와 경제영토를 확장해 왔다. 싱가포르항이 동남아 물류 플랫폼, 부산항이 동북아 물류 플랫폼, 로테르담항이 유럽 관문으로 성장해 국제물류 중심이 된 것이 좋은 예다.

공공재인 항만을 관리하는 제도는 각국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지만 대체로 해운항만 환경 변화에 대응해 생존과 번영을 위한 방향으로 변모해 왔다. 예를 들면 런던항은 해운항만환경변화의 수용·과당경쟁 해소·공공성 확보, 뉴욕항은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관할권 갈등 해소·공동번영, 싱가포르항은 아시아 거점 환적 중심항 도약 및 글로벌 항만운영사(GTO) 육성, 로테르담항은 지속적인 질적·양적 성장을 꾀했다. 부산항은 관료제의 비효율성과 경직성을 극복해 동북아물류중심지로 도약하고자 제도를 개선했고 공공재인 항만의 공공성과 상업성을 조율하는 등 제도혁신을 해왔다.

1997년에 싱가포르항과 부산항에도 항만관리제도 개혁의 큰 물결이 일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항만당국을 민영화해 싱가포르항만공사(PSA)를 설립했다. 한국 정부는 1999년 3월 국무회의에서 부산항 관리 운영기능의 공사화 결정, 2003년 항만공사법 제정, 2004년 부산항만공사(BPA)를 설립했다. 해운항만 환경 변화 속 부산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국가 관리방식을 항만공사 관리방식(BPA)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제도개혁을 통해 싱가포르항은 세계 1위 환적항, PSA는 글로벌터미널운영사(GTO)로 성장했다. 부산항은 세계 2위 환적항, BPA는 2030년 컨테이너 3200만 개 환적 60%(2004년 1041만개 41%, 2021년 2269만개 54%)를 처리하는 항만관리자이자 GTO로 도약하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BPA와 PSA를 비교해 보면 서로 배울 만한 제도적인 장점이 있다. 먼저 PSA는 정부로부터 항만관리 운영결정권을 보장받은 자율책임경영조직인 반면 BPA는 기획재정부(경영관리)와 해양수산부(항만업무)의 지도 감독을 받는 정책집행조직이다. BPA는 부산항 개발계획 및 개발방식을 수립하고 결정할 권한이 없다. 항만시설 사용료인 하역료도 국유공영 방식을 채택한 싱가포르에서는 PSA가 결정하는데, 공유민영 방식을 채택한 한국에서는 항만시설을 임차한 운영사와 이용자(선사)가 결정한다. 다수 운영사가 비슷한 품질의 하역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산항에서는 자칫 과당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데, 2개 부두가 추가로 개장하면 하역료 인하 경쟁이 우려된다. 항만 관리자가 항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항만의 공공성과 수익성을 적절히 조정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항에서 공공성을 담당하는 조직(MPA)과 상업성을 담당하는 조직(PSA)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했는데, 이 제도개혁으로 PSA는 글로벌터미널운영사(GTO)로 성장해 해외에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됐다. PSA는 직제를 사업본부와 지역본부로 나누고 지역별로 개별본부를 둔다. 반면 BPA는 부산항의 공공성과 수익성이 중첩되는 애매한 위치에서 항만시설관리라는 모호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어 자율성 부족과 옥상옥 논쟁에 휘말린다. 또한 행정대집행 권한도 없이 항만시설을 관리하며, 항만시설을 임대할 뿐 직접 운영은 하지 않는다. 올해로 설립 18년을 맞는 BPA는 이런 제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과와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냈다. BPA가 내세운 미래비전을 더 활기차고 충실하게 수행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과 평가와 제도 점검이 선행돼야 한다. 부산항 개발관리 운영과 관련된 다양한 조직과 권한 및 역할, 기능을 명확하게 조정하고 이에 따라 항만관련법제도 재정비해야 한다.

최근 사회과학 연구 중심이 집단(group,1960~1970년대)→국가(state, 1980년대)→제도(institution, 1990년 이후)로 옮겨왔다. 제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제도가 인간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지만 큰 제약도 준다고 한다. 런던항의 항만관리제도로 탄생해 각국 항만에서 도입한 항만공사는 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항만자치 원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항만을 관리·운영하는 제도다. 이런 연유로 공항 도로 철도 등이 전국 조직을 만들어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항만은 한국항만공사가 아닌 부산(인천 울산)항만공사와 같이 개별항만별로 관리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BPA의 운용실태를 보면 항만공사(Port Authority)라기보다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시장형 공기업인 항만공기업(Port Corporation)이다. 이것이 BPA 자율성 논쟁의 근원이 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의 항만관리제도 개혁으로 싱가포르항과 PSA는 큰 변화와 성과를 냈다. 국가재정을 투입하지 않고 제도개혁만으로 양적 성장과 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제도개혁은 해볼 만한 일이다. 항만 발달사를 보면 항만의 번영은 항만관리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