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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남은 것, 남긴 것, 그리고 기억하기 /오광수

‘터’만 남은 초량왜관 골목…물류도시 부산 ‘도시유산’

목포에서 본 근대유산들, 어떻게 ‘기억’할지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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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들과 부산 중·동구 일대 초량왜관 역사 트레킹을 떠나기 전 해당 코스와 지금의 장소를 꼽아봤다. 설문(設門, 왜인의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 만든 문) 자리는 부산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 1번 출구 쪽 상해문, 초량객사(일본의 사신들이 조선 국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던 곳)는 봉래초교, 연향대청(일본의 사신들에 연향을 베풀던 곳)은 광일초교…. 여기까지는 초량왜관 바깥쪽이다. 이제부터 왜관 내부. 서대청은 우리저축은행, 중대청은 대각사, 동대청은 부산은행 신창동 지점, 용두산공원을 지나 관수가(초량왜관 우두머리가 머물던 곳)는 MU호텔, 개시대청(조선과 일본 상인들의 무역 장소)과 수문(守門)은 동광동 삼거리 부근, 재판가(조선과 일본 간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던 곳)는 타워힐호텔 자리….

초량왜관은 1876년(고종 13년) 부산의 근대개항 이전 조선과 일본 간 유일한 외교·무역의 통로였다. 이곳만 열려 있었다. 세계적인 물류도시 부산의 뿌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지만 초량왜관과 관련해 남아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다. 관수가를 오르는 계단과 옛 초량왜관 건물들을 연결하는 골목길이 사실상 전부다. 초량왜관의 핵심 시설 가운데 하나인 관수가 건물은 보존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경성대 도시공학과 강동진 교수는 초량왜관을 “생활 속의 보편적인 역사문화, 즉 ‘도시유산(都市遺産)’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량왜관이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항구도시 근대도시 물류도시 등과 관련한 부산의 ‘다름’을 가장 강하게 표출할 수 있는, 부산이 진정한 세계적인 글로컬(glocal) 도시로 도약할 최고의 디딤돌이 바로 초량왜관”이라고 단언한다.

어디 초량왜관뿐이랴. 1910년 지어진 옛 부산역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때 무너져 내렸다. 르네상스식 2층 벽돌 구조의 그 건물은 사진과 자료에서만 만날 수 있다. 현재 부산도시철도 중앙역 12번 출구 인근에 세워진 ‘옛 부산역 터’ 표지석이 원래 있던 자리를 알려준다. 초량에 세워진 남선창고는 ‘터’만 있다. 남선창고는 1900년 부사 객주 정치국에서 주도해 세운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다. 이곳에 주로 보관된 품목은 명태. 과거 전국의 명태 유통 중심지이자 중앙 집산지가 부산이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럼에도 남선창고는 옛 백제병원 뒤편 모 대형마트의 주차장 한쪽에 붉은 벽돌로 된 벽으로만 남았다. 옛 부산세관 청사는 어떤가. 1911년 르네상스풍 건물로 준공된 붉은 벽돌 구조의 이 건물은 1979년 부두도로 확장 과정에서 어이없게 헐렸다.

한 달 전 전남 목포를 찾았다. 근대개항장 풍경이 제대로 간직된 그곳의 거리를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목포시 유달동 등지 602필지 11만4038㎡는 2018년 8월 6일 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특정 건물이 아니라 특정 지역 전체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불행이든, 행운이든 아직 1897년 근대개항장 목포의 도시 경관은 잘 보존돼 있다. 근대도시의 뼈대인 공간 구조와 근대건축물 등이 ‘살아’있다. 만호동 일원에는 옛 일본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목포근대역사관 2관) 등 다양한 양식의 근대건축물이 있다. 여기서는 ‘1897 개항문화거리’ 도시재생 사업이 한창이다. 목포시는 공적 활용이 가능한 근대건축물 10채를 사들여 보수·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목포 방문 때 곳곳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광표(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는 최근 출간한 ‘근대 유산, 그 기억과 향유’(현암사)에서 근대 유산을 기억하는 유형을 ①기억의 통일 ②기억의 단절 ③맥락의 상실 ④기억의 단절과 맥락의 상실로 나눴다. ①기억의 통일은 근대 유산이 보존돼 있고, 그 본래의 용도나 의미를 지키면서 현재의 용도를 가미해 사용하는 경우다. ②기억의 단절은 근대유산의 실물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경우다. ③맥락의 상실은 실물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다. ④기억의 단절과 맥락의 상실은 근대 유산의 실물이 훼손·파괴된 채 단지 역사 기록으로만 남은 경우다. 앞서 언급한 남선창고와 옛 부산세관 청사는 ④기억의 단절과 맥락의 상실에 해당한다. 부산의 근대개항장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부산항 제1부두는 자칫 ②기억의 단절 또는 ③맥락의 상실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다. 애초의 ‘원형 보존’ 결정이 제대로 실천될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부산항 제1부두는 근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이끈 해운업과 원양수산업의 개척 정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제1부두를 제대로 기억하려는 정책 논의를 기대한다. 그것은 ‘원형 보존’을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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