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면 해결할 수 없다. 말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말은 소통이다. 그래서 인간사는 소통에서 비롯된다.
정치인이 ‘놀고 먹는 자’로 불린 적이 있다. 현장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이 거셌던 1980년대 무렵이다. 당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일상어가 될 정도였다. 이 말은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호소였다. 하지만 정치가 결단하고 국민의 동의를 이루고 실행하는 과정은 그 어떤 노동보다 고통스러운 때가 많다. 한 초선의원은 정치를 ‘극한직업’이라고 푸념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인은 환호와 비난을 달고 산다. 하지만 정치는 말해야 한다. 말을 통해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고 미래로 가야 하는 것이 정치의 숙명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정작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대장동’이나 ‘주술’은 마르고 닳도록 읊어댄다. 후보검증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과하다. 대신 한국이 풀어야 할 숙제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는 사라지고 있다. 단순히 네거티브 전술 탓 만은 아니다. 여야 할 것 없이 ‘나쁜 정치적 의도’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갈 기회를 막고 있다. 표를 얻는데 불리한 문제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침묵이 당선에 유리하다는 계산은 문제를 말하고 풀어야 하는 정치의 본령을 벗어나는 일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정치의 효용은 거기서 끝난다.
정치가 입을 닫고 있는 문제는 여럿이다. 저출생 고령사회, 교육개혁과 연금개혁, 국토불균형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들 문제를 풀지 않는 한 국민은 행복하기 어렵다. 국가도 더 나은 선진국가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과업이란 뜻이다. 후보들의 공약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거나, 있더라도 표피적이고 단편적인 몇 글자로 포장돼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어느 후보도 이 문제들의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연금개혁문제는 표 계산에 바빠 개혁과제를 내팽개친 후보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는 지난 3일 첫 TV토론회에서 국민연금과 3대 직역연금의 통합 필요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통합방안에 대해서는 관련법 제정과 회의체 구성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연금고갈 문제의 해법은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의 전환이다. 그런데 누가 더 내고 덜 받을 지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연금개혁은 득표전략면에서 기피대상이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말’을 해야 한다. 후보들이 입을 다문 사이 연금폭탄의 시계는 더 빨라지고 있다.
저출생 고령사회는 단순히 인구 수의 감소와 인구 구조의 변화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이다. 그런데도 정부조직 개편이나 정부정책에서 인구영향평가를 반영하는 등의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인구문제를 다룰 정부조직과 정책 수립시 인구영향도를 반영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후보들이 말하지 않으니 공론화되지 않는다. 해법이 나올 리 없다.
서울공화국을 넘어서 수도권 공화국이 된 고질적 국토불균형 문제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지방분권형 개헌이나 수도권 과밀을 해소할 방안도 후보들의 기피대상이 된 느낌이다. 여야는 대선의 승부처를 수도권 민심으로 꼽는다. 수도권에 절반이 넘는 인구가 몰려 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한국을 집어삼킨 수도권이란 괴물에 대선후보들조차 주눅이 든 모습이다. 수도권 괴물이 갈수록 덩치를 키울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한국이 질식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후보들은 표 계산으로 입을 닫는다.
선거를 축제라고 한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의 해법을 찾는 신명난 판이기 때문이다. 이 축제에서 공동체는 미래로 나갈 방향을 정한다. 실행할 에너지도 축적한다. 이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고 고민할 때 가능하다. 이번 대선은 그런 의미에서 축제는 아니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는 ‘가장 무도회’일 뿐이다. 더 나아가 이번 대선이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를 더 키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방 안의 코끼리는 문제를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 말하지 않는 현상을 뜻한다. 방을 점령한 코끼리에게 밟히는 낭패는 시간문제다.
대선이 30일 남았다. 긴 시간이다. 후보들은 ‘방 안의 코끼리’를 몰아낼 해법을 제시하길 바란다. 불편하고 손해나더라도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를 내주기 바란다. 국민은 그런 후보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