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손자 윤이후가 함평현감으로 있을 때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를 유용한 죄로 서울의 의금부 감옥에 갇힌 것은 1693년 10월 10일이었다. 실제 유용한 일이 없었으므로 억울했지만, 어쨌건 ‘입건’이 되었던 것이다. 흥서·종서·두서 등 세 아들은 금오문 밖 의막(依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이후는 피의자로 잡혀온 것이니, 감방에 갇혀 홀로 있어야 마땅했겠지만, 사정은 달랐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먼저 의금부에 근무하고 있던 도사(都事) 정행만·박경승·권성중과 지의금부사 정유악과 유하익이 심부름꾼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양주목사 이형상도 문 밖에 와서 문안했다.
11일 심리가 시작되었고 결과는 곧 왕에게 보고되었다. 심리 후 익산군수 권혁을 비롯한 군수 병사(兵使) 주부 진사 생원 등 모두 열일곱 사람이 세 아들이 머무르고 있는 의막을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영암군수 권찬, 봉사(奉事) 권찬, 호조참판 이봉징, 병조참판 권해, 공조참판 김빈, 감사(監司) 이운징, 판결사 배정휘는 직접 올 형편이 못 되었는지 사람을 따로 보내 위문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차관 3명과 도지사가 포함된 호사스런 위문단이었다. 그런가 하면 훈련대장 이의징은 심부름꾼을 보내 안부를 묻고 장작 50개, 숯 5두(斗)를 보냈다. 원정(原情, 전후 사정을 호소하는 문서)을 작할 때는 이형상이 귀중한 조언을 해 주었다.
조정에 포진해 있는, 힘 있는 조력자들의 설계에 따라 실제 심문은 형벌을 가하는 일 없이 이루어졌다. 아니, 제대로 된 심문도 없었다. 윤이후는 아무 일없이, 출옥할 예정이었다. 출옥이 늦어진 것은, 의금부의 최고책임자인 판의금부사가 어떤 인사의 잔치에 참석하고 이어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윤이후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12일에는 경기 관찰사가 아침 일찍 의막을 찾아와 안부를 물었고, 사서(司書) 홍만기, 정언(正言) 이상훈이 편지를 보내어 역시 안부를 물었다. 감역(監役) 송기창, 전적(典籍) 김태정은 직접 찾아왔고, 승지 심중량, 병조참판 권해, 예조판서 류명현은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이날 찾아오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위로한 사람은 모두 19명이었다. 13일에는 16명이 윤이후를 찾거나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거의 다 벼슬아치들이었고, 그 중에는 멀리 경상도 예천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 14일부터 21일까지 20명 안팎의 벼슬아치와 그 친지들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감옥에 갇혀 있다 뿐이지 그의 사교생활은 여전히 아니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죄에 대해 21일 조율(照律)이 있었다. ‘무단으로 함부로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를 쓴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곡식을 유용한 것은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고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의 곡식을 유용한 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윤이후는 이마저도 억울했지만, 이 조율은 사실상 그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24일 최종 선고가 있었다. 국가의 곡식을 유용한 죄는 삼천리 유배에 처하는 것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고신(告身, 職牒)만 빼앗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한다는 것이었다. 그날로 감옥에서 나온 윤이후는 11월 1일 한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닷새 동안 위로 차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기에 바빴다.
윤이후로서는 보름 동안 옥에 갇힌 것은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가 옥에 갇혔을 때 고위관료를 비롯한 백수십 명이 안부를 묻기 위해 직접 찾아오거나 사람과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이 누린 특권이었다. 보통의 백성이 사소한 절도를 범해(아니, 의심만으로도) 옥에 갇히면, 모진 고문 끝에 시신이 되거나 불구의 몸이 되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윤이후의 특권이 거대한 전장(田莊)의 소유, 벼슬살이, 고급 사족들끼리 혼인, 사교를 통해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특권은, 그것을 누리던 사람들에게는 워낙 자연스러운 것이라,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개 서민에 불과하지만, 그런 특권층을 흠모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