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해준 것만큼 남들도 내 생각을 해주면 좋겠어.” 친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서쪽으로 저무는 해는 눈을 뜨고 있기엔 눈부셨고 울음을 참는 친구 얼굴을 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참지 마. 양보도 그만해. 배려해 준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너의 친절이 너무 아까워. 너 자신을 더 사랑해주란 말야.” 친구에게 하는 말인지 내가 듣고 싶던 말인지 모를 순간이었다. 그때 눈앞에 있던 친구의 얼굴위로 쑥부쟁이 꽃이 겹쳐졌다. 쑥부쟁이는 이맘때 피어나는 들국화 중 하나다. 가녀린 줄기에 잎도 크지 않다. 꽃잎은 코스모스처럼 둥근 원을 그리고 연보라빛이 소박하다. 숲이라 할 만한 곳을 지나갈 때면 무리지어 핀 모습을 볼 수 있어 색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들국화 자료를 찾던 중 이름에 얽힌 사연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가족을 위해 쑥을 캐며 살던 가난한 대장장이의 큰 딸을 ‘쑥부쟁이’라고 불렀는데 안타깝게도 산비탈에서 떨어져 죽고 그 자리에 핀 꽃을 동네사람들이 쑥부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왜 착한 이들에게는 슬픈 사연이 많은 걸까? 쑥부쟁이 처녀는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을 가지고서도 자신보다 타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느라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쑥부쟁이의 어린 순은 나물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처녀가 꽃이 된 것이 정말 맞구나 싶어서 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리고 꽃을 보고 쑥부쟁이라고 불렀다는 동네 사람들 역시 처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속상해 하는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감정적인 충고를 했던 나처럼 말이다. 나는 왜 그토록 슬펐을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했더라면 그 삶은 달라졌을까?

쑥부쟁이 꽃을 제대로 알아본 건 꽃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된 그해 가을이었다. 길가에 주차를 하고 그야말로 산비탈을 올라야만 갈 수 있는 시할머니 산소 근처에서였다. 바람이 불어오자 연보랏빛 물결이 일렁였다. 매년 찾아가던 곳이었는데 처음보는 풍경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피지 않았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더 이상 이름 모를 들꽃이 아니었다. 쑥부쟁이 들국화는 인간적인 욕망을 애초에 가지지 않은 신성이 되어 다가왔다.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이 승화된 것이었다. 쑥부쟁이의 사연을 듣고 내가 흘린 눈물이 연민이든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든 나의 무의식을 달래는 치유가 있었다. 슬퍼서 아름다운 쑥부쟁이 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했다.

몇 년 전 딸아이가 잦은 두통과 위염 증세를 보여 병원을 찾았던 날, 연륜이 깊은 의사 선생님은 잊을 수 없는 처방을 내리셨다. “너 착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앞으로 너는 착하다는 말을 듣는 걸 칭찬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마라. 착하다는 것은 남들에게 좋은 거지 너한테는 좋을 게 없어. 싫을 때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그래야 아프지 않아. 알았지?”

그 이후 별다른 약도 없이 딸아이를 괴롭히던 증세가 사라졌고 건강한 사춘기를 맞이했다. 여전히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앞서는 편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내 친구나 내 딸아이같은 착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일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쑥부쟁이 같은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려면 우선 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타인과 자신에 대한 구분없이 사랑으로 대하며 살 때 싫다는 말도 누구하나 상처받지 않도록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길가다 만난 쑥부쟁이가 내게 말한다. 누군가의 배려를 알아채지 못하고 나의 이익만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라고.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거 알아? 가을이 왔어. 올 가을은 네가 다 가지길 바래.” 이제 나를 사랑해 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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