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책이 나오기 전 출판사로부터 저자 소개를 작성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두세 줄이면 충분한 짧은 글이었지만, 자신에 대해 직접 쓰려니 어색하기만 하고 좀처럼 괜찮은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함께 지내는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24세 고졸 무직’이라고 쓰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장난치지 말라며 화를 내면서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그만한 표현이 없었다. 사실관계가 명확하면서도 너무 진지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세 단어의 조합은 적절한 화학반응처럼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이 ‘유머’가 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농담이 편견과 차별이 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마이스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한 나에게 ‘고졸’은 부끄럽거나 숨겨야 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졸은 선택일 뿐이었다. 학교에서도 진학보다는 취업을 우선시했고, 어른들도 대부분 대학교에 갈 필요 없다며 우리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기특한 청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찍부터 진로를 선택하고 사회에 나온 생각이 깊은 청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스스로를 조금 다른 존재라고 느꼈다. 만연해 있는 편견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열심히 산다면 차별 따위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에 ‘조금 다른 고졸’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단순히 ‘직장인’이나 ‘청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정체성의 일부를 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쓰는 과정’을 ‘커버링(covering)’이라 부른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고졸’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최종학력이 고교 졸업인 사람을 가리키는 약칭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흔하게 묶어 쓰이는 무직 미필 모쏠 같은 단어들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졸은 우리 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또는 하지 못한 채 남들보다 뒤처진 존재’였다. 게다가 ‘고졸 성공신화’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성공은 의외의 사건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난했지만 노력해서 성공했다’거나 ‘장애가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뤘다’는 식의 이야기와 용법이 같았다. 그러니까 ‘고졸’은 ‘가난’과 ‘장애’와 같은 선상에서 소비되는 단어인 셈이었다.

특정 상황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차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일마저 개인의 탓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커버링’은 훨씬 고도화된 차별의 결과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공부할 수 있다’거나, ‘누구라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 책임을 교묘하게 당사자에게 전가했다.

누군가는 분명 공부가 더 하고 싶을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차별을 숨기고 왜곡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고졸이 선택이라는 내 생각을 먼저 수정해야 하겠다. 고졸은 사고였다. 전문직을 양성하겠다는 국가 정책은 폭력이었고,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던 어른들의 말은 명백한 가해행위였다. 하지만 사회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나는 지나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남들이 쉽사리 ‘고졸’이라는 단어로 박제하는 시간 속에는 사실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온전히 이해할 때야 비로소, 삶은 ‘유머’가 된다. 비웃음과 조롱이 아니라 진지한 통찰의 과정이 된다.

우리가 함께 웃기 위해선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할까.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는 아득한 기분이 들고는 한다. 하지만 끝도 없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문장을 가다듬겠다. 그리고 올해도 책이 나온다면, 실타래 너머 당신에게, ‘25세 고졸 무직’이라는 농담을 해보아도 좋겠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