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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명 칼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방법

  • 이제명
  •  |   입력 : 2021-07-08 19:09:3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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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1914년에 시작되었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1차 세계대전은 실로 전 세계적인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공산주의가 정치이념의 전면에 등장하며 사상과 정치의 정신적 패러다임을 변화시켰고, 산업과 경제의 큰 틀을 흔들며 물질적 영역의 변화까지 선도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유럽의 열강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 현재의 중동 국가들로 해체되면서 영토라는 큰 전리품이 재편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은 전 세계 면적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이미 차지했고, 나머지의 대부분도 먼로주의에 근거해 미국의 보호를 받던 시기였으니,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오스만 제국으로 유럽 열강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향했던 것은 당연했다.

외적 요인 외에 내부적으로도 오스만 붕괴의 조짐은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1914년의 오스만 제국 실상을 보여주는 단편적 자료 하나가 있다. 190만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단선 철로의 총 길이가 고작 5991㎞였으니, 산업혁명을 통해 첨단 교통망부터 정비하기 시작한 당시의 유럽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증기선을 앞세운 외국기업이 해상교통을 장악했고, 도로와 철도조차도 대부분 외국의 소유였다. 캐러밴과 마차 위주의 육상교통과 전통 돛배 수준의 해상교통만이 전부였던 오스만 제국이 첨단 기술을 앞세운 외국 열강과 경쟁할 수 없었기에, 사실 제국 붕괴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자주국방의 고육책으로 영국에 주문한 증기기관 구축함 두 척은 결국 처칠의 ‘먹튀’로 이어지고, 이 사건은 다시 세계대전으로 이어져 제국 붕괴의 숨은 배경이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다.

교통망을 장악하지 못한 정부가 국부의 이탈을 통제할 방법은 없었으며, 취약한 산업 기반 때문에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구도는 재정 악화를 가속화시켰다. 젊고 역동적인 세대들에 의한 자강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미 동력을 잃은 늙고 병든 오스만 제국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자주적 실행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격변의 소용돌이에 내몰린 국가의 교과서적 사례라 볼 수 있다.

얼마 전 ‘동남권 그린수소항만조성사업’이라는 대형사업의 기획 보고회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대상으로 개최되었다. 부산시가 기획의 책임을 맡아 각계 전문가 그룹들의 지혜를 모았고, 동남권 메가시티의 실현을 위한 수소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삼았다. ‘동남권 수소항만’의 인프라를 조성하자는 제안이다. 범세계적 이슈로 부상한 ‘수소경제’는 수소를 주요 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 핵심인데, 에너지의 수송과 보급에 항만의 역할이 빠질 수 없다. 대규모로 에너지를 사용하는 항만의 특성상, 항만부터 수소 친화형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있다. 따라서, 수소경제의 중심이자 핵심시설로서 ‘hydrogen-ready’항만 인프라를 준비하자는 것이 기획의 주요 골자다.

결코, 빠른 것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수소항만 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롱비치항과 일본의 고베항은 수소특화형 항만으로 변신을 시작했으며, 로테르담 함부르크 니더작센 괴텐부르크 마르세이유 발렌시아 등 유럽 주요항만들도 수소를 다루기 위한 인프라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지금 우리는, 100년 이상을 이어져 오던 에너지 패러다임이 화석 에너지에서 수소를 필두로 한 친환경 에너지로 바뀌는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런 흐름을 잘 읽어내고 있다는 안도감의 한편으로, 격변의 시대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오스만제국의 발자취가 교훈이 되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교체와 수리가 쉽도록 크기와 모양을 규격화한 무기체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병마용갱(兵馬俑坑) 발굴을 통해서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 군사력과 용병술이 무기체계의 표준화를 통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기초로 사상 정치 도량형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통일작업을 완성한 진시황의 혜안이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유럽과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둘 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역사적 격변기를 지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의 주체적 창조자인지, 아니면 피동적 추종자인지에 따라 역사의 무대에 올랐던 주인공들 운명이 갈렸다는 점은, 2000년 시간적 간극을 관통하고 있는 공통점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수십명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소경제 시대의 지역 현안을 분석하고 해법을 도출한 결과가 요식행위로 사장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새로운 질서에 지레 겁을 먹은 채 결단과 책임을 떠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소한, 세계가 탐내는 미래에너지 수출입 전진기지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 누군가 진시황에 빙의되어 수소시대 그린항만 조성부터 한번 지휘해 보기를 기대한다. 2000년 전 창과 칼이 그랬듯, 표준화된 빅데이터 무기를 마음껏 활용하면서.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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