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은 ‘노매드(nomad·유목민)’의 시절이다. 노매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에게 노매드는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신생(新生)의 유목민’을 의미한다. 반면 올해 여름, 미국 독일 캐나다 일본 등 세계 곳곳에 넘쳐나는 노매드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를 떠도는 ‘무주택 난민’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 랜드’가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코로나 시대, 지구촌은 폭증하는 노매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코로나로 실직하거나 수입이 줄어 집세를 못내는 세입자가 640만 명에 달한다. 미 정부는 이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세입자의 퇴거를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이 조치는 두 차례 연장돼 지난 달 말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미 정부가 이달 말까지 한 달 더 연장했다. 다음 달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미국은 진짜 ‘노매드 랜드’가 될 것이다.

독일 베를린에선 많은 무주택자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버려진 건물에서 산다. 폭등하는 집세 때문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무주택자들이 야영지를 만들어 거주한다. 행정당국이 이를 폐쇄하자 무주택자를 보호하는 시민단체와 경찰 간에 큰 충돌이 벌어졌다. 일본에선 노숙인의 증가와 함께 15년 전 자취를 감춘 노숙인의 구걸이 다시 등장했다. 전단지 배포, 줄서기 대행 등 노숙인이 하던 일거리가 코로나로 사라지면서다. 이런 형편에 올림픽 경기장 부근 공원에는 노숙인의 거주를 막기 위한 장애물이 설치됐다. 인간의 거주권은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롭다.

우리나라도 무주택 난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이 작성한 올해 5월 국내 인구이동 통계에 따르면, 서울(-8309명) 대구(-2391명) 부산(-1525명) 등 8개 시·도는 인구가 순유출됐다. 유입보다 유출이 많다는 뜻이다. 서울의 인구 순유출은 지난해 3월부터 15개월째다. 반대로 경기(9322명) 경북(1327명) 충남(1253명) 등 9개 시·도는 인구가 순유입됐다. 대도시 순유출 인구의 상당수가 무주택 난민이다. 서울에서 경기·인천으로, 부산에서 김해·양산으로 집세가 싼 곳을 찾아 하향이동한다.

그 원인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집세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달 18일까지 전국 아파트의 3.3㎡당 평균 전셋값은 19.2%(968만 원→1154만 원) 올랐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올해 하반기에도 전국의 전셋값이 2.3% 올라, 지난해보다 0.4% 포인트 높은 5.0%의 연간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무주택 난민의 증가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2021년의 한국 역시 ‘노매드 랜드’인 셈이다.

무주택 난민의 하향이동은 대도시 전세→대도시 월세 또는 지방 전세→지방 월세로 진행된다. 코로나로 인한 수입 감소와 집세 상승으로 그 하향이동에 가속도가 붙었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1분기 전국 월세 거주 가구의 한달 평균 주거비는 32만8000원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30만8000원)보다 6.1% 증가한 것으로, 월세 가구 한달 평균 소비지출액(198만4000원)의 16.5%를 차지한다. 월세 세입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 무주택 난민의 종착지는 거리다. 달리 갈 곳이 없다.

그럼, 이제 물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이어야 하느냐”고. 영화 ‘노매드 랜드’의 원작 논픽션에 붙은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부제처럼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 책을 쓴 제시카 브루더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 이상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이다. 우리는 음식과 거주지만큼이나 희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그게 필요하다. 거리에서 삶을 끝내지 않고 하향이동한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희망 말이다.

그에 관한 가장 큰 책임은 25차례 정책을 내놓고도 부동산 투기와 집값·집세 상승을 막지 못한 정부·여당에 있다. 그런데 여당에겐 책임지는 모습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최근 종합부동산세 부과 기준을 공시가격 9억 원에서 ‘상위 2%’로, 양도소득세 비과세 기준을 9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조정하는 ‘부자 감세’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정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는 인물을 청와대 고위직에 기용하는 마당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국민이 나서야 한다. 주권 대행자가 일을 잘못하면 권리 행사를 위임한 국민이 바로잡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년 대통령 선거가 나설 때다. 토지공개념 개헌, 부동산시장법 제정 등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옥석을 가리는 일은 국민의 몫이다. 무주택 난민의 노매드를 청산하고, 차별 없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신생의 노매드로 전환할 수 있을지 여부는 거기에 달렸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