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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원 칼럼] 소명, 메시아, 팬덤 그리고 대선

  • 차재원
  •  |   입력 : 2021-07-01 19:45:2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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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k als Beruf’. 독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1919년 뮌헨의 대학생 집회에서 한 강연을 엮은 책이다. 100년 전 강연이지만 지금도 무릇 정치인이라면 베버의 얘기를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그가 정치인 자질로 꼽았던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이 역사 속 위인들의 공통점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우리말로 처음 번역됐을 때 제목은 ‘직업으로서의 정치’. 요즘 번역본의 제목은 ‘소명으로서의 정치’다. 둘 다 맞는 표현이다. 독일어 ‘Beruf’가 직업과 소명의 뜻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 사실 베버가 이 단어를 쓴 것도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름지기 정치란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 생계를 해결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도 하라”는 신의 명령 역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가 정치를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규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충실하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사실적 접근을 통해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정치의 요체라는 것이다.

대표적 영어 번역본의 제목이 ‘정치라는 직업과 소명’인 것도 이상과 현실을 모두 정치에 담고자 했던 베버의 고민을 잘 이해한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달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다시 세우겠다”며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냈다. 강한 소명의식이 드러난다. 그 하루 전 퇴임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 역시 ‘대한민국 앞날을 위해 어떤 역할을’ 다짐했다. 시대적 사명을 내세워 대선 참여에 방점을 찍었다는 해석이다. 대선 도전이 유력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역시 ‘승자독식 타파와 격차 해소’라는 소명으로 무장하고 있다.

물론 오랫동안 직업적 정치를 해온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의원, 정세균 전 총리 등도 대선에 나서면서 나름의 소명을 내세우고 있다. 문제는 저마다 신념을 투영한 소명의식이 너무 강해 현실에 바탕한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상대적으로 위축돼 보인다는 점이다.

검찰과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훼손 비판에도 임기 도중 하차 뒤 대선에 도전하는 윤석열과 최재형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 두 사람 모두 공정과 정의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구하는 게 더 우선된다는 논리를 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버식 표현대로 정치에서의 ‘책임윤리’를 저버렸다는 비판에선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더 큰 문제는 강한 소명의식이 강한 지지세와 무턱대고 결합할 경우다. 후보 스스로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착각을 넘어 이른바 ‘묻지마식 지지’가 모아질 경우 우려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큰 탓이다. 한국 대통령제의 ‘롤모델’ 나라, 미국의 2016년 대선은 이런 상황 전개의 비극적 결말을 잘 보여준다. 느닷없이 정치에 뛰어든 공화당 트럼프 후보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로 선거판을 강타했다. 그의 강한 소명의식은 중산층 이하 소외 백인들의 박탈감과 맞물리면서 폭발적 지지세를 형성했다.

졸지에 트럼프는 이들의 구세주, ‘메시아’로 떠올랐고 박빙의 승부 끝에 백악관을 차지했다. 집권 4년 내내 그는 실제 메시아를 자처하며 대통령 권한을 맘껏 휘둘러 오직 지지층 이해만 충실히 대변했다. 그새 인종과 정치적 갈등의 ‘용광로’로 불렸던 미국은 쩍 갈라졌고, ‘민주주의 후진국’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각성한 유권자가 대거 참여해 역대급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는 낙선했다. 하지만 트럼프식 정치, ‘트럼피즘’의 폐해는 끝나지 않았다. 그의 등장 이후 줄곧 맹목적 지지를 해온 지지층은 강한 ‘팬덤’으로 뭉쳤고, 결국 대형사고를 쳤다. 지난 1월 ‘선거 사기’를 외치며 미국 의사당에 난입하는 반민주 폭거를 자행했다. 책임보다 신념을 우선한 강한 소명이 ‘묻지마 지지층’과 결합해 ‘메시아 정치’로 진화하고, 이를 통해 형성된 ‘팬덤’이 민주적 질서를 깨트릴 수 있다는 정치학자들의 우려가 진짜 현실이 된 것이다.

아직 우리 정치에선 이런 정형성이 완결된 형태로 나타나진 않았다. 하지만 강한 소명으로 무장한 후보, 그가 마치 일상의 모든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줄 거라 절대적으로 믿는 유권자, 사이버 커뮤니티를 통한 집단적 확증편향 학습으로 ‘무오류 신화’에 빠진 팬덤 등 ‘트럼피즘’의 토양은 이미 형성돼 있다. 대선 때면 매번 ‘신한국 창조’ ‘제2건국’ ‘747 선진국’ 등 역사적 소명을 담은 구호가 등장하고 지지자들은 구세주 마냥 치켜세웠다. 태극기부대, 강성 친문은 각각 ‘탄핵의 강’ ‘조국의 늪’이란 정치적 후폭풍에도 그들만의 견고한 성을 허물지 않고 있다.

이번 대선판은 초반부터 책임보다 신념을 앞세운 후보들의 초반 강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유권자들의 ‘균형적 판단’이 정치인 못지않게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유다.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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