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옛 대저수리조합을 다시 찾았다. 마침 근처에서 구술 아카이브를 진행했던 터라 어쩌다 보니 그 앞을 지나게 됐다.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 앞쪽은 이미 ‘정리’돼 있었다. 철거를 앞둔 건물은 처량해 보였다. 때 마침 보슬비까지 내렸다.

대저수리조합과 대저의 역사성·장소성을 드러내는 열쇠 말은 많다. 일제의 식량공급기지(산미 증식 계획), 낙동강 삼각주, 김해평야, 김해수리조합, 천수 농업에서 관개 농업으로, 낙동강 범람과 바닷물 유입, 낙동강 유역 개수공사와 일천식 제방, 대저수문과 녹산수문, 구포다리와 구포역, 신장로(신작로), 대저 배(梨)와 구포 배(梨), 그리고 대저1동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

딱 1년 전 6월은 뜨거웠다. 강서구가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의 철거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신장로 일원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신장로 전원 교향곡)과 연계한 문화시설(강서열린문화센터)을 짓겠다고 했다. 강서구는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이 1916년 수리조합 설립 당시의 것이 아니며 1950년대 초 비행기 추락사고로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지은 지 50년 이상 된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등재의 요건을 갖춘다. 당연히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일었다.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스란히 담은 옛 대저수리조합의 건물이니까. 여론이 악화되자 강서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설계 공모에 참여하는 업체에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의 보존 방안을 찾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허무는 것으로 정해졌다. 지난 4월에는 강서열린문화센터 규모 확장에 따른 주민공청회도 열렸다.

강서열린문화센터 착공은 올 연말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과 뒤편 비료창고가 있는 자리에서 이뤄질 듯하다. 건립 규모는 애초 지하 2층, 지상 4층에서 지하 1층, 지상 8층으로 바뀌었다. 국비와 시비, 구비 등 332억 원이 사업비로 투입된다. 강서열린문화센터는 오는 2023년 여름이면 준공된다. 덩치가 커지는 만큼 이곳에는 강서문화원과 다목적홀, 전시관, 프로그램실 등 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이 함께 들어선다. 신장로 일원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은 대저1동 신장로와 번덕·신촌마을 일대 6개 통 0.78㎢에 정주환경을 조성하는 게 골자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그렇게 결론 나 진행 중인데,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헐리는 건물에 매달릴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건물을 쓰면 된다. 역사성은 크게 훼손됐지만, 장소성은 계속 유지하는 까닭이다. 강서열린문화센터는 복합문화공간이니 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강서열린문화센터의 ‘열림’의 성격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방안은 가칭 ‘마을 기억의 공간’을 두는 것이다. 마을 기억·기록의 보관소이다. 이는 마을기록관 마을역사관 마을전시관 커뮤니티센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더욱이 대저1동은 최근 1만8000가구가 들어서는 신도시 예정지로 선정됐다. 부산연구개발특구의 배후부지가 된 것이다. 가뜩이나 도시개발 바람에 떼밀려 있는데, 언제 신도시 개발의 블랙홀로 빠져 들지 모를 처지다. 그래서 ‘마을 기억의 공간’ 마련이 더욱 절실하다. 대저지역 일본식 가옥 등 근대문화유산은 한국의 근대성을 살펴볼 수 있는 한 표본이자, 부산지역 근대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된다. 근대사 공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보여준다. 또 근대문화유산의 대저지역 역사성을 반영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대저지역 근대문화유산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다. ‘마을 기억의 공간’은 대저1동이라는 마을공동체의 지역성과 역사성 정체성을 보여주고, 간직하는 곳이다. 이를 만듦으로써 지역 주민에게는 유대감 강화, 정체성 확립, 소통의 창구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나 대저지역을 찾는 외지인에게는 마을의 역사 등을 안내해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필요성이 있다. 이 같은 마을 기억과 기록의 저장소를 새로 들어서는 강서열린문화센터에 두자는 것이다.

눈을 부산 북구 화명동 대천마을로 돌려보자. 이곳에는 주민이 주체적으로 예술가들과 함께 교육 문화 생태 환경 등의 자생단체를 꾸려 20년 넘도록 가꿔왔다. 대천마을이라는 마을공동체의 소통의 연결고리이자 평생학습 공간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맨발동무도서관이다. 어느 곳 못지않게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이 공동체에도 개발의 바람이 들이닥쳤다. 이에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마을의 역사를 저장하는 마을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결국, 마을기록관 설립이란 성과로 일궈냈다. 대저지역 역시 풍부한 아카이브 자원을 지녔으므로, 제대로 된 마을공동체 ‘플랫폼’을 만들면 된다. 그 출발점은 대저1동 ‘마을 기억의 공간’이다.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