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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의 페미니즘을 읽다<2>법정에 선 성폭력 생존자의 사법 투쟁기

성차별적인 사회와 사법제도에 대한 강렬한 고발장

고통과 치유의 과정에 대한 자기 고백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정 투쟁기

피해자들을 향한 위로와 연대

  • 국제신문
  • 최현진 기자 namu@kookje.co.kr
  •  |  입력 : 2021-05-15 09: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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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연재를 여기저기 공유하면서 클릭을 읍소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심지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도 전화와 문자로 응원해 주셨습니다. 소속 단체에 공유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잘 써서라기보다 페미니즘이 부당하게 공격당하고 있는 요즘, 남성이 페미니즘이라는 이슈를 정면으로 들고 나온 것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 - 말하고 싸우고 연대하기 위해 법정에 선 성폭력 생존자의 사법 투쟁기 (브리 리 지음, 송예슬 옮김, 카라칼출판사, 2020.4.)

이제 드디어 첫 방송이 업로드됐습니다. 대본도 미리 준비했고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리허설했음에도 카메라 앞에 서니 너무 어색합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너무 무거운데, 너무 처지는데’ 하면서도 말을 끊지를 못합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불안합니다. 자꾸 서류를 뒤적거립니다. 이런 모습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다니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찍고 싶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습니다. 기왕 시작한 일, 앞으로 더 나아지겠지 스스로 다짐하며 용기를 내 봅니다. 좋아요, 구독하기, 공유하기 아시죠? 댓글 남기면 책 선물도 드립니다~

   
류제성 부산시 감사위원장이 ‘페미니즘을 읽다’ 유튜브 방송에서 부산대 오정진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읽다’라는 방송에서 처음으로 다룬 책은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Eggshell skull rule)’입니다. 대담자는 오정진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이었습니다. 오 교수님은 대학에서 법여성학, 법사회학, 법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고 여성학협동과정 주임교수이기도 합니다. 부산대 인권센터장을 역임한 경력과 부산시 성희롱 고충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다수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조사한 경험이 풍부하며 성폭력 사건 법정 방청도 많이 한 분입니다.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이라는 용어부터가 생소할 겁니다. 이 원칙은 누군가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쳤는데 피해자의 두개골이 계란껍질처럼 얇아 사망했다면, 머리를 가격한 자는 그 사망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피해자가 얼마나 연약한지와 상관없이 가해자에게 모든 피해의 책임이 있다는 영미법상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은 가해자가 예상할 수 없었던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우리 법제보다 가해자에게 더 엄격히 책임을 물음으로써 한층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랬다면 저자가 이런 책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저자는 성범죄 사건에서 이 원칙이 과연 지켜지고 있는가, 사법절차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책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의 표지 이미지.
이 책의 부제를 보면 책의 성격과 내용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하고 싸우고 연대하기 위해 법정에 선 성폭력 생존자의 사법 투쟁기’.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저자가 법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퀸즐랜드 지방법원에서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지켜봐야 했던 성범죄 재판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이고 2부는 초등학생 때 여섯 살 많은 오빠 친구로부터 당한 성폭력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 정의를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며 성차별적인 사회와 사법제도에 대한 강렬한 고발장이자, 고통과 치유의 과정에 대한 자기 고백이자 법정 투쟁기이며, 피해자들을 향해 ‘결코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용기를 북돋고 위로와 연대를 보내는 따뜻한 편지입니다.

●2019 호주출판상업상, 2019 빅토리아 프리미어 문학상 수상!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 책이 읽기에 너무 부담스럽고 어둡고 무겁기만 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유려한 문장, 흡입력 강한 서사로 한 편의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문학적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재미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인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성폭력을 예방하고 가해자를 정당하게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사회와 사법시스템에 대해 저자와 함께 분노하고 긴장하고 울고 웃으며 책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는 비문학 논픽션이나 에세이로 분류되겠지만 문학작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에 호주출판상업상과 빅토리아 프리미어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객관적으로도 검증되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브리 리 닷컴(www.bri-lee.com)의 초기화면.
저자 브리 리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재판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데뷔작인 이 책을 썼습니다. 현재 브리리 닷컴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접속해 보시면 자신을 작가, 반성폭력 활동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법학박사과정에 다니고 있고, 현재는 각종 연설, 집필, 방송 활동을 통해 피해자의 목소리를 확장하고 성범죄 관련 입법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자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생생히 고백

이 책의 강렬한 호소력은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정직하게 쓴 글이라는 데에서 생긴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하기 10여 년 전에 이웃사촌이자 오빠의 절친 중 한 명으로부터 추행을 당했는데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억누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끔찍한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고통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폭식과 이어지는 구토, 원인 모를 복통, 불쾌함, 자해, 경직반응, 극심한 자기혐오와 죄책감, 수치심, 열등감, 자기비하, 악몽과 자살충동. 고소를 하게 되면 수사, 재판 과정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입게 될 고통에 대한 죄책감, 남자친구가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소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괜히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자신을 불결하거나 수치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내면에 추한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기억이 과연 사실인지에 대한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는 실제로 간발의 우연한 계기로 정말로 위험한 순간을 넘기기도 합니다. 이런 자기혐오와 비하, 열등감 등은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하기 전에도 있었던 것인데 그 원인을 정확히는 몰랐고 여러 성폭력 사건을 접하고 자신의 피해사실과 가해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그리고 상담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아동 강간을 비롯한 숱한 성범죄 사건을 재판연구원으로서 그저 지켜봐야 했습니다. 판사의 업무를 보조할 뿐 재판에 개입하거나 의견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에서 개별 사건의 잔혹함과 끔찍함에 더해 이를 부인하고 고소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피고인·변호인의 파렴치한 변론과 편견에 가득 찬 배심원들의 믿을 수 없는 무죄평결까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저자를 분노하게 하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고통받게 합니다.

재판연구원으로서 경험한 첫 사건에서 저자는 배심원 후보 여성 한 명이 자신도 비슷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적이 있어서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심원단에서 제외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후 같은 이유로 여성들이 배심원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게 됩니다. 저자가 법정에서 맞이한 이 첫 장면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여성들의 가해자들은 모두 신고되고 처벌받았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그럴 리 없다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거짓말한다, 일단 의심하라!!

무엇보다 법정에서 다른 범죄 피해자와 달리 성폭력 피해자의 호소는 늘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받습니다. 심지어 호주 법원의 지침서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고소인의 심리 상태’에 관한 항목이 있는데, 판사는 성폭력 범죄로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증언하기 전에 고소인의 호소가 진심인지, 연기하고 있지 않은지, 고통을 유발한 다른 원인은 없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허위로 고통을 호소하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으므로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배심원단에게 권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같은 지침에 피고인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거짓말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유죄의 증거인 것은 아님을 유의하라’고 돼 있다고 합니다. 즉 피고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유죄는 아니지만, 피해 여성이 강간 당한 뒤 울며 신고하는 행위는 연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 당일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지요?

왜 이제 와서 고소하는 거지요?

얼마나 자주 성관계를 가지나요?

술을 얼마나 마시나요?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요?

사건 당일 피임 중이었나요?

피해자는 사건 당일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지, 성관계를 먼저 원해서 유혹하지 않았는지, 피고인 외에 성관계를 가지는 남자가 있었는지, 술이나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지, 심지어 피임 중이었는지 추궁당합니다. 피해자의 나이가 어리고 순진무구하거나, 성폭력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의 명백한 신체적 피해가 있거나, 아주 정숙한 여성으로 보이거나, 아무런 모순없이 신경질적이지 않게 차분하고 일관되게 피해를 진술하지 않는 한, 배심원들은 ‘그 여자의 진술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해소할 수 없다’며 무죄를 평결합니다.

가해자는 특별한 소아성애자나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사람들이 취약한 피해자를 의도적으로 ‘타깃팅’합니다. 그럼에도 법정에서는 피해 사실을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진술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취약성이 오히려 피해자의 진술을 믿을 수 없는 주장으로 만들고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게 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른다. 범행 동기에 대단한 이유랄 것은 없다. 그 사람 역시 단지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내 의사와 감정은 철저히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내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는 성적 호기심과 만족감을 충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내가 받을 충격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린아이를 성추행하는 것은 그 아이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격과 신체를 짓밟는 짓이다. 아직 굳지 않아 보드랍고 여린 마음을 영구적으로 망가뜨리는 짓이다.” (429쪽)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라

피해자의 말을 들으라

피해자다움은 없다

우리의 재판 현실도 한번 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폭로하는 호주의 법정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법원은 오랫동안 피해 여성이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당하지 않은 이상 강간죄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아 왔습니다. cctv 등 객관적 물증이 없는 경우 피해자의 진술을 잘 믿어주지도 않았습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대법원은 강간죄 성립에 필요한 폭행, 협박의 정도를 과거보다 완화해서 보고 있고 성희롱·성폭력 재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면서 피해자라면 당연히 어떻게 행동할 것 혹은 어떻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채 그 기준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 것과 성희롱·성폭력 피해자가 처한 개별·구체적인 사정과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강조하는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성별 간 불평등뿐만 아니라 계급, 연령, 경제력, 학력, 국적, 인종 등을 포함한 위계질서 속에서 약자의 입장에 놓인 사람의 상황과 관점을 반영하는 것, 기존의 법과 남성 지배적인 문화가 몰랐던 피해자들의 경험, 지식을 들어보라는 것, ‘피해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없애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 교수님은 이에 더하여 ‘성인지 감수성’은 어떤 고정된 기준이 아니고 마치 숙제처럼 피해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흔히 이야기되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것은 피해자가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제된 결과로 피해자를 탓하는 문화가 수치심이라는 언어로 전수되는 것이므로 법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피해 인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대법원도,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이를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만으로 협소하게 해석하여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해석을 통해 확장한 것입니다.

재판 진행에 있어서도 비공개재판이 일반화되고, 증인신문시 피고인과의 분리, 인적사항 공개 금지, 취약한 피해자의 특성 배려, 인권 존중, 중복·반복적 신문, 위협적·모욕적 신문, 과거 성경험, 성적 경향 등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에 대한 신문, 수치심이나 공포감을 조장하는 신문 등이 금지되고 재판장이 적절히 개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을 다수 방청한 오 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투쟁으로 법정과 관련 법률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사실이지만 담당 재판부, 재판 시기, 사건에 대한 사회적 주목도 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어 법정에서 여전히 피해자의 내밀한 사생활이 추궁당하고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호주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별로 다르지 않아 저자의 묘사가 오히려 놀랍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피해자에서 고소인으로

그러나 법적 투쟁만이 유일한 방법이어서는 안 돼

이렇게 사건을 지켜보는 것만도 힘든데, 앞서 설명드린 대로 저자는 어릴 적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끊임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환멸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법정의 모순과 불합리하고 성차별적인 사법제도의 벽 앞에서 쉽게 고소를 결심하지 못합니다. 긴 시간 고통스러워하던 저자는 결국 30년 전에 당한 성폭력 사건을 고소해 그동안 짊어지고 살았던 짐을 벗어버리고 정의를 구현한 피해자를 보고 용기와 희망, 그리고 결연한 의지를 얻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임을 단번에 깨닫고 경찰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고소인’이라고. 이 대목에서 수동적이고 연약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당사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려는 저자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 교수님은 이 책은 사법투쟁기이기 때문에 그 맥락에서는 자신을 고소인으로 지칭할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요구가 대단히 적극적인 의미가 있지만, 반드시 법적 투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더 빨리, 적절한 시기에 단죄와 치유가 가능했어야 했다, 이 대목이 반드시 법적 투쟁만이 방법이라는 식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가해자를 단죄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로 피해사실을 상세히 신고했음에도 그 기록은 분실되어 버리고,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치는 경찰관 앞에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계속 끄집어내며 같은 진술을 반복해야 하고 심지어는 경찰에서 한 핵심적인 진술이 누락되기도 합니다. 고소했음을 밝히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과거 추행사실을 털어놓도록 유도하는 저자와의 통화에서 추행 사실을 시인하면서 저자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러 번 같은 짓을 했다’고 인정한 가해자가 정작 수사·재판 과정에서는 고액의 전관변호사를 수임해 혐의를 부인하면서 합의를 시도하고 담당 경찰을 통해 고소를 계속 진행할 것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반복해서 묻습니다.

범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요? 저자는 가해자가 다른 여성에게 같은 짓을 반복하게 하지 않기 위해, 성폭행을 당하고도 침묵 속에 고통당하고 있는 이름 모를 여성들을 위해 사건 진행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두려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피해자들이 두렵고 힘들고 약해진 상황에서도 진실을 마주하고 이겨내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약했기 때문에 약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용기를 낸 것입니다(오 교수님은 이 부분을 아주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았습니다. 책 310~311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피해자의 사정이나 의견 따위 상관없이 지정되고 제대로 고지되지 않으며 수시로 변경되는 재판 일정, 한없이 지연되는 재판, 가해자의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저자는 가해자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인생 전부를 통제하고 잡아먹고 있다는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그 모든 과정을 겪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기까지(판결 확정까지가 아닙니다!) 꼬박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다. 많은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신고하기도 어렵지만 막상 신고하고도 가해자가 기소되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지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고학력 전문직 중산층 백인 여성이기에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변함없이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남자친구와 가족들이 있었기에 고소를 포기하거나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할뻔한 위기의 순간도 넘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자원을 가지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법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지 않을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 책을 읽으면 배심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데 대상이 제한적이고 배심원단의 결정에 법적 구속력도 없으며 배심원단의 평결에 법관이 영향을 미칠 소지도 큰 편입니다. 이런 국민참여재판을 영미식 배심재판제도로 확대, 강화하자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인종·문화·성적 편견에 갇힌 배심원들의 판단이 훨씬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게 되고 배심제도에 대해 회의하게 됩니다.

책에 보면 의붓아버지가 범한 아동 성추행 사건에 대해 불과 40분 만에 무죄 평결을 한 배심원들이 점심시간에 제공된 샌드위치를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며 투덜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그들에게 피해자의 고통은 점심으로 똑같은 샌드위치를 다시 먹지 않기 위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만 고민해도 될 정도의 값어치였다. 윌리엄스 사건은 내 안 깊숙이 두려움이라는 씨앗을 심었고 이후 그 씨앗은 성범죄 재판에 참여할 때마다 안에서 곪아 터지듯 조금씩 자라났다. 사람들이 여자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곧 내 말을 믿어줄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69쪽).

우리나라의 경우 피고인들은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음에 비해 피해자가 원하지 않아서 국민참여재판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오 교수님은 법관에 의한 재판이 더 피해자를 잘 보호, 배려하고 사법정의를 보다 잘 실현할 수도 있겠지만 지혜로운 법관이 보살피는 구도를 기대하고 안주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 가면서 보통 사람들의 판단, 상식, 힘을 믿고 겪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결국 저자는 끈질긴 투쟁 끝에 가해자에게 합당한 유죄판결을 받아냅니다. 변호사 자격도 취득합니다. 그럼에도 법률가의 길을 포기합니다. 저는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오 교수님은 법정 투쟁이 끝난 후 연극이 끝난 텅 빈 무대 위에 선 듯한 느낌이었지 않겠나, 법정 바깥으로 나가 법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통역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과 방송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고통과 트라우마를 겪는지 알게 됐고 우리와 너무 유사한, 어떤 면에서는 우리 보다 못한 호주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성희롱·성폭력과 관련해 전향적으로 바뀐 판례의 의미와 관련 입법의 변화를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간 제가 피해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듣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책과 방송을 통해 부당한 현실의 벽과 고통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정의를 실현한 저자의 용기와 진실의 힘을 꼭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페이지 : https://www.youtube.com/channel/UCrkIzCyYTRTnpZd6dvjaj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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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이건희미술관 부지 무상 제공” 해운대구도 유치 선언
  3. 3스토리人 도심갈맷길-세 가지 이야기 <하> 피란역사문화길
  4. 4현 청사 부지 활용·상인 반발 해소 ‘두 토끼 잡기’
  5. 5코로나19 확진자 이틀째 300명대… 부산서는 오전 확진자 없어
  6. 6브라질서 1조 해양설비 수주…대우조선해양 7년 만에 ‘잭팟’
  7. 7부산진구 양정 요가학원서 불...반려견 사망
  8. 8"왜 1만 원 안 거슬러줘" 버스 운전 방해 50대 체포
  9. 915일 부울경 대체로 흐리고 비소식
  10. 10오늘의 날씨- 2021년 6월 15일
  1. 1kt 농구단 탈부산 나비효과 <상> 사직구장 재건축에 ‘날개’…‘임시 둥지’ 마련해야 순항
  2. 2롯데·한화, 1위 경쟁만큼 뜨거운 탈꼴찌 경쟁
  3. 3권순우 남자 테니스 79위 도약…도쿄올림픽 출전 청신호
  4. 4유소연 LPGA 메디힐 챔스 공동 3위
  5. 5에릭센, 경기 중 심정지…축구팬 충격
  6. 6아이파크 안병준 첫 해트트릭
  7. 7롯데 루키 김진욱, 천신만고 끝 첫 승
  8. 8과연 ‘캡틴 손’…벤투호 무패로 월드컵 최종 예선행 견인
  9. 9김학범호, 도쿄올림픽 앞둔 마지막 평가전서 가나에 3-1 완승
  10. 10롯데, KIA와 더블헤더 2차전 3 대 6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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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대표 후보 인터뷰
나경원
국민의힘 대표 후보 인터뷰
김은혜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한 도시의 리더가 된다는 것
‘융합의 시대’를 진정으로 지향하려면
기고 [전체보기]
IT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하나 /정재연
지역발전과 문화의 힘 /김철훈
기명칼럼 [전체보기]
기후위기 시대의 셈법 ‘빼기와 나누기’
부산 방역 최일선 수의사가 없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부산 자치경찰위원회 사무국장도 경찰 출신…취지 역행 우려 /박호걸
체계적인 ‘동백전 행정’ 쫌! /김진룡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국제성을 띤 악기 태평소
한국피리, 서양피리를 만나다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2+1 책임제’ 족쇄로 안 남으려면 /유정환
‘신산업 도시 부산’의 필요조건 /이석주
도청도설 [전체보기]
자전거와 티코
페르시아어 ‘진달래꽃’
독자의 소리 [전체보기]
부산에 있다 그리고 있었다 /이용희
해수부, 물고기 복지 위해 일하나 /정성문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목포 ‘당거’ 팥빙수
외식업에서 디테일이란?
사설 [전체보기]
2030 엑스포, 이제부턴 산적한 과제 해결 집중해야
부산도 철거 공사 불안, 철저히 현장 점검 나서라
여론 광장 [전체보기]
코로나시대 커뮤니티 비즈니스 ‘관광두레’ /조윤미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최고의 기쁜 날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국민의힘 변화 바람 어디로
부러우면 지는 거다
정책 제언 [전체보기]
한미정상회담 성과와 개성공단 재가동 /문창섭
국립 UN-삼성 문화박물관을 상상하며 /황성욱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오월의 노래
봄날의 상념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와인! 콘텐츠가 필요하다
와인어게인
특별기고 [전체보기]
공공콘텐츠 없인 북항 성공 없다 /서의택
민주화·민족자존에 바친 삶, 편히 쉬소서 /허운영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나비 그림의 명인, 남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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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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