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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분홍색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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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색깔은 흰색이다. 서구 백인 제국들이 아프리카 흑인과 아시아 황인을 지배한 결과다. 검은색에 대한 차별이 특히 심했다. 문명(흰색)을 위협하는 야만(검은색)이라는 이유에서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대표적인 기준이 위생이었다. 백인은 청결한데, 흑인은 불결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문명화 수단이 비누였다. 1940년대 영국의 비누 제조회사 ‘유니레버’는 “비누는 문명”이라고 했다. 비누 회사들은 “비누는 흑인도 하얗게 만든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알제리의 흑인 철학자 프란츠 파농은 그래서 “흑인에게는 백인이 되어야만 하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고 통탄했다.

검은색은 과연 야만의 색깔일까. 고대 이집트인들에겐 정반대였다. 나라이름을 ‘케메트(검은 땅)’라고 붙였는데, 이 단어에는 ‘문명’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나일강이 범람한 뒤 나타나는 연안 토지의 색깔이 비옥한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검은색을 상징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 등에 사용토록 한 중국의 첫 통일제국 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색깔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선호가 다른 상대적,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그런데도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적 정서인 것처럼 흑백 차별론을 고집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이런 현상을 ‘신화’라고 했다. 인간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라는 얘기다. 이른바 ‘흰색 신화’다.

색깔 신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분홍색 신화’의 뿌리도 깊다. 우리 현실은 옷도 장난감도 여자아이 것은 분홍색이다. 이게 자연적 정서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안소니 반 다이크가 1637년 그린 ‘찰스 1세의 다섯 아이들’에는 남자아이가 빨간색 옷을 입고 있다. 당시 유럽 귀족사회에선 빨간색을 남자아이에게 어울리는 색깔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1927년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지의 미국 주요 백화점도 분홍색을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의 옷 색깔로 권장했다고 한다. ‘분홍색 신화’가 등장한 건 1950년대부터였다.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 변화가 낳은 신화다.

지난 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영유아 제품을 성별에 따라 구분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아이들에게 성차별적 편견과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지당한 판단이다. 아이들이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자라는 사회에서 성평등 미래를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나. 인권위의 ‘분홍색 신화’ 붕괴 시도가 꼭 성사되길 기원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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