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광장’은 남북분단과 민감한 이데올로기 문제를 한국전쟁 이후 가장 먼저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19 혁명 후 5.16 군사쿠데타 사이 열린 정치적 공간이었기에 출간될 수 있었다. 반면 지난해 말 작고한 남정현의 ‘분지(糞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실린 이 작품은 ‘미국’이라는 존재를 우화적인 기법으로 다루며 해방 이후 최초로 작가를 법정에 세운 역사적인 작품이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북한의 조선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돼 작가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당시로서는 매우 돌출적인 반미의식이 작품에 풍자적인 우화기법으로 드러나 있다. 우화기법은 등장인물의 이름에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홍만수는 홍길동의 10대손이고, 만수라는 이름도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향미산은 홍만수가 포위되어 미국의 미사일 포격을 받게 되는 산으로 미국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당대 한국 사회를 비유했다. 스피드 상사는 홍만수의 여동생 분이를 능욕하는 인물로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 일반을 암시한다. 작품은 강한 남성성의 제국(미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한국을 고통받는 여성으로 설정하는 젠더적인 비유가 돋보인다. 물론 2021년의 시점에서 ‘미국의 존재’에 대한 작가의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1970년의 한미관계사가 그 폭을 넓혀 다양한 층위로 진화했고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한미동맹의 굳건한 반석 위에서 성취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지’의 우화를 구성하고 있는 적대적 대립과 폭력성의 단순 논리가 현재의 북미관계에는 여전히 유효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안타깝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되고 있다. 지난 3월 15~18일 블링컨 국무장관과 오스틴 국방장관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동맹국의 입장을 청취했다. 지난달 2일 워싱턴에서는 한·미·일 국가안보실장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3월 18일에는 알래스카에서 중국과 고위급 회담을 갖고 대북문제에 대한 중국의 협조 가능성을 확인했다. 물론 이 회의에서 양국은 어떤 공식 입장도 발표하지 않았지만, 양국의 공통 관심사를 확인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한다고 전해진다. 미국은 북한과도 접촉을 시도했다. 미 국무부는 2월 중순 이후 뉴욕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등 여러 채널을 통해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3월 18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명의의 담화는 미국이 대북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지 않는한 미국과의 그 어떤 접촉이나 대화에도 응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현재의 북미관계는 ‘분지’에서 나타난 세계관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 정권을 ‘분지’의 주인공 홍만수를 보듯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 장성택 처형, 미국 내 탈북자들의 북한 인권 상황 증언 등을 통해서이다. 바이든 대통령, 해리스 부통령, 블링컨 국무장관 등은 한결같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독재자 폭군 도살자 등에 비유하며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북한의 인식 역시 미국의 대북제재 압박처럼 향미산에서 포위된 홍만수의 의식세계와 유사해 보인다. 북한 지도부의 대미 호전적인 발언도 미국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되돌려주겠다는 결의에 찬 홍만수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악순환이 되어 미국 내 대북 강경론의 입지를 강화시켜서 북미 협상의 재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나마 지난해 11월 블링컨 국무장관의 뉴스위크 인터뷰는 긍정적이다. 그는 제재 압박을 통해서 북한을 군비축소 협상장으로 끌어내고 싶은 의도를 밝혔다. 북한과 협상을 할 수 있는 대외정책 코드는 미국의 비확산체제이며, 이를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군비축소 차원의 협상을 강조한 것이다. 소설 ‘분지’와 현실과의 차이는 홍만수가 분지와 향미산을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분지의 소설적 상상력은 풍자에 그쳤다. 그러나 적대적 대결 논리가 파국일 수밖에 없는 이 새로운 현실은 해법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해법은 외교적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 오는 21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첫 단추를 기대해 본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