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영지’와 ‘수영유사’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부산의 수영 이야기다. 1850년 무렵 발간한 ‘내영지’는 당시 수영이 어땠는지 알리는 일종의 백서이며 일제강점기 작성한 ‘수영유사’는 임진왜란 전후 역사와 수영 문화를 다뤘다. 부산 전체 역사를 다룬 고문서도 드문데 수영 역사를 담은 점만으로도 이 둘은 우리 지역의 보배다.
이렇게 중요한 보물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래돼서 그렇고 일반의 기억에서 멀어져서 그렇다. 더 오래되기 전에, 더 멀어지기 전에 ‘내영지’와 ‘수영유사’를 복원해야 하고 역사·문화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내영지’는 당시 경상좌수영에서 펴낸 공문서이며 ‘수영유사’는 수영의 큰 어른 최한복(1895∼1968) 선생이 일제 감시망을 피해가며 두루마리 자락에 한 글자 한 글자 남긴 피눈물의 기록이다. 이 둘의 발간은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내영지’ 한자는 萊營誌. 내영은 동래 수영을 줄인 말이다. 수영에 있었던 조선시대 수군부대인 경상좌수영에서 펴낸 군사용 백서다. 조선시대는 수영이 일반명사였다. 팔도 모두에 수영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경상도와 전라도는 좌우로 나누어 두 군데가 있었다. 조선을 호시탐탐 넘보던 왜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에 국경 관리 중요성이 컸다.
그중에서도 경상좌수영, 곧 지금의 부산 수영은 왜와 가장 가까웠다. 그러기에 부산 수영은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맡은 지역도 낙동강에서 경북까지 광범위했다. ‘내영지’를 펴낸 이유와 당위성이 여기 있었다. ‘내영지’가 나오기 직전 경상좌수사 이형하가 쓴 서문에도 그런 사정이 언급된다. 불안정한 정세에서 난국을 타개할 힘의 축적이 ‘내영지’였다.
이형하 서문은 수영 25의용과 ‘정방록’도 언급한다. 25의용은 임진왜란 7년 내내 왜적에 대항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이고 ‘정방록’은 전쟁이 끝나고 10년 후 부임한 동래부사가 그들의 공적을 기록한 고문서다. 25의용 언급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한다. “황령산의 지는 달과 장산 냇가의 가을비는 귀신이 하소연하는 듯 구슬프다. 아아, 참으로 참혹하여라.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냐!”
‘황령산’ ‘장산’도 나오는 ‘내영지’는 부산시가 2001년 ‘국역 내영지’란 제목으로 펴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문가용이었고 발간 부수가 한정됐다. 시민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발간할 필요가 있다. ‘수영유사’는 수영의 문화를 역사와 함께 다뤘다. 특히 ‘수영야류’ 복원은 ‘수영유사’의 가장 큰 공이다. 들놀음이자 마당놀이 ‘수영야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멀어지던 ‘수영야류’ 대본을 또박또박 기록한 최한복 선생의 ‘수영유사’는 현재 극소수가 남아 언제 멸실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때도 이어지던 것이 우리 대에 끊긴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내영지’와 ‘수영유사’. 부산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지역 역사이며 자부심이다. 수영구가 나서면 좋겠다. 수영구는 경상좌수영의 후신이며 수영야류의 본향이기에 더욱 그렇다.
민주평통자문회의 부산수영구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