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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고상한 척’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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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의 유머가 화제다. “모든 상이 의미가 있지만 특히 ‘고상한 척하는(snobbish)’ 것으로 유명한 영국인이 (나를) 좋은 배우로 인정해줘 의미가 있고 영광”이라며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밝힌 소감이 그것이다. 시상식에 참석한 영국 아카데미 인사들이 폭소를 터뜨리는가 하면, 미국 영화매체 ‘벌처’는 “2021년 최고의 수상소감”이라고 극찬했다. ‘snobbish’라는 단어 하나로 영국인의 위선적 심성을 예리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그런 심성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뜻하는 ‘신사(gentleman)’란 말의 어원이 된 ‘젠트리(gentry)’의 생활을 다룬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젠트리는 귀족과 자영농인 요먼(yeoman) 사이의 사회적 위상을 지닌 지배계층을 지칭한다.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상속재산이 적은 남녀가 돈 많은 결혼 상대를 찾는 이야기다.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분별력과 감수성), 귀족과 결혼하려고 간교한 계략을 꾸미는(설득) 등 오스틴의 소설에는 결혼을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 수단으로 여기는 젠트리가 넘쳐난다. 하지만 젠트리는 겉으론 고상한 척 위선을 떤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에서 젠트리의 이런 이중성을 선과 악의 상반된 인격을 지닌 인물로 그려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19세기 영국의 두 얼굴이다.

‘snobbish’는 영국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지도층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4·7 재·보궐 선거 결과 기사에서 여당이 참패한 원인을 “문재인 정권 진보 인사들의 위선 때문”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한국에선 이를 내로남불(naeronambul)이라 한다”며 우리말 조어를 로마자로 표기하기까지 했다. 영국의 지도층에겐 그래도 위기마다 목숨을 걸고 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덕적 의무)’의 미덕이 있다. 영국 고위층 자제가 다니는 이튼칼리지 출신 중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이가 2000여 명에 달하며,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때는 여왕의 둘째아들이 헬기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다.

영국은 오스틴과 스티븐슨 같은 지식인들의 사회 비판과 풍자를 통해 젠트리의 이중성을 성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미덕은 그 결과다. 윤여정의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그런 성찰을 거친 까닭이다. 우리가 ‘내로남불’을 사라진 과거의 악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될 날은 언제일까.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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