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재운 뒤 한숨 돌리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언니로부터 사진 3장이 도착했다. 혀를 길게 내밀고 웃고 있는 강아지 달이의 모습과 지천에 피어 있는 봄꽃 사진들이었다. 황령산 봉수대 가는 길목에서 찍은 것이었다. 달이와 함께 봄나들이를 나간 모양이다.

날은 더 없이 따사롭고 달이는 행복해 보였고 꽃은 어여뻤다. 잊고 있던 이 봄이 조용히, 변함없이 오고 있었다.

잊어버리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전적 의미로 잊어버리다는 기억이 사라지거나 할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할 때 사용하고, 잃어버리다는 물건이 없어지거나 신체 기능이 사라졌을 때 사용한다.

잊어버린다는 건,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꿰어 맞출 수 있다. 무언가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다는 건, 의미가 조금 다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실을 받아들 일수 밖에 없는, 포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일까, 잃어버림은 슬픔이다.

문득, “야야, 괴롭다” 슬픔을 괴롭다는 말로 표현했던 도둑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뭐가 그리 괴로우셨던 걸까? 돌이켜보면 괴로움의 이유는 자신의 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인 듯 했다.

치매 환자인 할머니는 물건을 잘 훔쳤다. 한 날은 양말 4개를 겹겹이 신고 나오다 간호사에게 들키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누군가의 머플러를 훔쳐오기도 했다. 성경책을, 팬티를, 지갑을, 동화책을 훔친다고 해서 도둑 할머니라고 불렸다.

나는 목걸이나 지갑이 없어졌다며 가까운 사람을 범인으로 오해하거나 사실 아닌 것을 사실 인 것처럼 고집을 피우는 치매 증상은 많이 봤다. 그러나 할머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증상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지인의 말로는 할머니는 젊었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 다정하고 마음씨 고운 분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오지랖이 넓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 날, 할머니의 얼굴은 멍이 들어 있었다. 양말을 팬티 기저귀 안에 숨기고 나오다 머리채가 잡혔는지, 모양새도 엉망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병실 마다 기웃거리며 “야야, 그건 그리 하믄 안 된다.” “밥은 묵었나?” 온갖 간섭을 하고 다니다 왜 자꾸 귀찮게 하냐며 어떤 할아버지에게 주먹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다정함과 고운 마음씨에 오지랖까지 더해져 결국 사달이 났던 거다. 도둑 할머니는 쉼터 탁자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할머니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것이 없었다.

“야야, 괴롭다”고 하시며 할머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와그라노?”

그 말속에는 할머니의 모든 삶이 함축되어 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착하고 다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지금에서야 오지랖이라고 사람들이 싫어 하지만. 나는 꿈 많은 소녀였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년은 아니었제. 남한테 피해 주는 마, 그런 몰상식한 인간은 절대 아닌 기라. 내게도 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봄을 잃어버렸다 아이가. 이래 휠체어에 묶인 채 내 봄이 가버리는구먼. 근데, 다들 나한테 와그라노?”

어쩌면 할머니는 이렇게라도 도둑맞은 ‘당신의 봄’을 노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제 울었냐는 듯 아이들은 꿀잠을 자고 있다. 할머니의 안부가 더욱 궁금해진다. 물건을 훔치다 간호사와 싸우고 계시는 건 아닌지, 휠체어에 묶인 채 괴롭다고 외치고 계시는 건 아닌지, 창밖만 하염없이 응시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엉엉 울고 계시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다정함과 오지랖으로 여전히 병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할머니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동화책을 또박또박 읽어주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벚꽃들이 놀이터 바닥으로 사뿐이 내려앉는다.

잃어버렸던 봄과 다시 만나기를… . 도둑 할머니의 봄을 기다린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