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양비’를 세상은 역시 가만두지 않았다. 2017년 대선 직후 ‘잊힐 권리’를 내세우며 홀연히 해외 유랑길에 오른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최근 민주당 민주연구원장으로 복귀하면서다. 누구보다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누차 강조했던 그였기에 세상의 관심은 당연했다. 첫 출근길 그의 말처럼 “피하고 싶은 자리”였겠지만 결국 그는 돌아왔다. 그만큼 문재인 정부가 현재 처한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세상이 다시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이유다.
그의 복귀만으로도 이처럼 세상의 관심이 뜨거운데 덜컥 사달이 나버렸다. 서훈 국정원장과의 회동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오지만 억울할 만도 하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데다 귀국 인사차 만났다는 양 원장 말이 그리 틀려보이지 않아서다. 아무리 대통령 복심이라지만 ‘사람 만날 권리’마저 박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회동에는 현직 기자도 동석했으니 정치적인 목적의 자리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이래서 그가 해외 유랑 시절 귀국하기가 겁난다고 했던 모양이다.
다만 귀국과 함께 당의 싱크탱크 수장을 맡은 이후 행보라는 점에서 비판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이미 지난달 취임 직후 문희상 국회의장과 독대하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실세임을 과시했다. 이 역시 인사차 방문이었지만 정당 지휘부도 아닌 원외 인사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에 국정원장과 비밀 회동을 했으니 총선 관련 이야기가 오고 갔으리란 추측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내년 총선 ‘북풍 기획설’을 거론하는 자유한국당 주장이 너무 앞서간 것이긴 해도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한 건 그의 잘못이다.
만약 그가 귀국해 특별한 자리 없이 서 원장을 만났다면 그리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연구원장이 어떤 자리인가. 공천권은 없다고 하나 내년 총선 전략과 정책을 총괄하는 핵심적인 당내 기구이다. 게다가 이례적으로 부원장에 현역 의원이 3명이나 포진했다. 이러니 양 원장을 두고 원내대표와는 별개의 ‘원외대표’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여당 내에서조차 경계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당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사적이라지만 서 원장과의 만남은 신중하지 못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양 원장은 올 1월 한 인터뷰에서 청와대에 다시 들어갈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안 간다”고 단호하게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 이유로 그는 “대통령 판단이시지만, 내가 어떤 자리를 맡더라도 주목을 안 받을 수가 없게 돼 버린다. 역대 대통령 측근들의 비극을 많이 봐 왔다. 측근 문화도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정권이 어려워지면 공직은 불려갈 수도 있지 않나”란 질문에는 “그런 특별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다. 측근이라고 해외를 떠돌 이유는 없지만 ‘새로운 선례’를 만들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세간의 모든 관심은 그가 과연 다시 대통령 곁으로 돌아올 것인가란 문제였다.
그가 언급한 ‘특별한 상황’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집권 3년 차를 맞아 각 분야에서 불거지는 문 정부의 위기가 그를 불러 들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이유가 뭐든 그는 돌아왔다. 비록 청와대는 아니라도 자리는 의미가 없다. “정권 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라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복귀 이유가 문 대통령의 성공을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잊힐 권리’도 좋지만 ‘문 대통령을 위한 의무’가 지금으로선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인 셈이다. 우리 정치사에 수많은 비극으로 나타난 측근 문화를 바꾸는 선례를 지키지 못한 게 다소 아쉽기는 해도 탓할 생각은 없다. 그가 문 정부의 남은 임기를 성공적으로 보필한다면 그게 훨씬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양 원장은 해외 유랑 시절 자신의 존재가 문 대통령에게 양날의 칼일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잘 쓰면 약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시스템을 깨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그간 자칫 독이 되느니 비극의 싹을 자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한 ‘특별한 상황’이 오고 말았고, 결국 문 대통령과 한 배를 탔다. 이런 그를 세상이 가만히 놔둘 리 없다. 말 하나 행동 하나 살얼음 밟듯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공세가 퍼부어질지 그가 모르지는 않을 터이다. 이번 서 원장과의 회동에 쏟아진 억측을 억울해 할 일만은 아니다. 그나마 복귀 초기에 예방주사 한 번 제대로 맞은 것으로 여길 일이다. 역대 정권의 측근들이 스스로 독으로 변해가는 걸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 많은 비극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이 있었겠나.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