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언론인 출신의 한 시사평론가가 우리나라 기득권 사회의 민낯을 꼬집은 책을 펴내 시선을 끈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인맥의 그물망 막후에는 혼맥(婚脈)이 있으며 이는 곧 금맥(金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어 이런 혼맥은 세습되는 까닭에 이를 끊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병폐 가운데 하나인 ‘금수저·흙수저 논쟁’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회 최상위 계층들의 혼맥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산업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정·관계 집안끼리 혼사가 많았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라 재력을 가진 이들이 주류로 대거 부상하면서 정·관계와 재계 집안 간 결혼이 뒤를 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고(故)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선경그룹도 노태우 전 대통령과 자식의 결혼을 통해 혼맥을 형성했다.

하지만 사회가 성숙해져 정치권력의 힘이 약해지면서 이 같은 흐름도 바뀌는 분위기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 가 국내 100대 그룹 집안의 혼인 건수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재계와 정·관계 집안 간 혼사는 부모세대의 경우 23.4%였으나 자녀세대에서는 7.4%로 크게 줄어 들었다. 또 기득권층이 아닌 일반인과 결혼하는 비율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과거 우리 사회에 큰 폐해를 끼쳤던 ‘정경유착’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재계의 달라진 결혼 형태가 권위주의적 기업문화의 타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자녀세대들의 재계 집안 간 결혼은 52.2%로 여전히 높았다. 오히려 부모세대(49.3%)보다 비율이 더 늘어났다. 정경유착이 아니라 이제는 ‘재계유착’을 더 걱정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됐다.

따지고 보면 결혼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 타인의 혼사를 두고 제3자가 왈가왈부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바 가진 계층끼리 혼인을 통한 인맥쌓기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 미친 악영향을 고려하면 부정적인 눈길을 거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재계 집안이 누구와 어떤 식의 결혼을 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만 지켜준다면 이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