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거나 순서를 바꾸어도 합은 같다는 것이다. 눈앞의 하찮은 이익을 따지는 어리석음을 비유한다. 그런데…. 과연 그 둘은 같은가. 전혀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숫자의 합이야 같겠으나 내재적 가치는 딴판이다. 먼저 주는 건 믿음과 신용을 교환하는 것이다. 나중이란 것은 일종의 미래 가치다. 미래 가치는 불확실성이 동반되며 당연히 신뢰가 떨어진다. 자, 그러면 당신은 어떤 걸 선택하겠는가.
뭐, 머리카락 홈 파는 소리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살면서 우리는 늘 뭔가를 주고받는다. 돈과 물건을 교환하거나 우정, 사랑 등 하여튼 어떤 가치를 주고받는다. 가격의 교환과 가치의 교환이라? 도토리의 합이 같다는 건 단순한 가격의 교환에 불과하다. 거기에 믿음과 신뢰, 신용 같은 것도 함께 교환된다. 그게 가치의 교환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한진해운의 어처구니없는 침몰이다. 왜 어처구니가 없는가. 가치의 거래가 없이 가격의 흥정만 벌였기 때문이다. '협상 천재'라는 책에 따르면 협상의 결렬은 대개 가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
숲을 잘 보존한 지주가 있었다. 숲이 우거지니 멸종위기 동물도 서식하게 됐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환경 보존을 위해 갖가지 제약이 가해진 것이다. 화가 난 땅 주인은 나무를 베어 숲을 파괴해 버린다. 지켜야 할 가치는 사라지고 손실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걸 유식한 말로 파이 한정 편견이라 한다.
한진해운 사태는 이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숲을 망가뜨린 땅 주인과 똑같다. 반세기 동안 쌓아올린 해운 시스템, 수출입 물류망, 회사의 거래선과 영업 노하우, 국가의 신인도…. 이런 숨은 가치는 안중에도 없이 인공 호흡기를 떼 버렸다. 땅값 떨어질까 숲을 망가뜨린 무지함이라니…. 해운업이 조선, 철강, 항만, 물류, 금융업에 미치는 악영향은 깡그리 무시했다. 부산항이, 부산이 입을 타격?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채권단이 한진그룹에 요구한 자구안은 대략 6000억 원. 한진그룹이 내놓은 건 4000억 원에 플러스 알파였다. 차액은 2000억 이하. 그것 때문에 물류대란을 일으킨 게 채권단과 정부다. 이런 행태를 선명성 편견이라 한다. 협상에서 가격에만 매몰돼 일을 망친 것이다. 파탄으로 잃는 기회비용, 해운업이 주는 부가적 가치는 무시된다.
운임이 회복되지 않으면 또 엄청난 추가 비용이 든다고? 우발사건 약정이란 게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실화될 때까지 약정을 미루는 것이다. 이른바 미해결의 해결. 또는 조건부 약정으로 이 장벽은 통과할 수도 있다. 한진해운은 용선료 협상, 해운사 동맹인 얼라이언스 가입에 성공했다. 대부분의 보유 선박이 컨테이너선이며 그것도 미주 노선에 운용 중이다. 이미 미주 노선은 운임 인상이 예정돼 있으니 협상을 파투낼 일은 결코 아니다.
대우조선해양은 두고 한진해운을 죽이는 그 놀음의 뜻은? 참 어렵다. 대우의 산소호흡기를 유지하는 데 수조 원, 조선업 지원에 수십 조 원을 퍼부었다. 그것도 청와대 서별관의 비밀회의까지 하면서. 추가 부담 때문이라면 대우부터 날리는 게 순리다. 국영기업과 사기업의 차이라고? 언제부터 대우가 국영이었나. 대책없이 자금을 퍼부어 그리 된 것이지.
아무리 뒤적여 봐도 해독이 안 된다. 대한민국 선원이 바다 위의 난민이 되고 물류대란으로 비난이 국가로 쏠릴 때, 그때도 대통령은 말 한 마디 없었다. 국가 비상 사태이건만 정부는 느긋하다. 왜 그럴까. 바닷길이 막혀 해운업을 잃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해운업의 고리가 빠져 해양산업이 무너지든 말든인가. 바다를 버리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것도 모르는 내륙족들 같으니라고.
2000년 10월, 유엔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분담금 10억 달러 미납으로 투표권이 박탈될 위기에 처했다. 미 상원은 분담금 비중을 25%에서 22%로 낮추지 않으면 체불금을 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때 유엔대사 리처드 홀브룩이 내놓은 게 다중쟁점 협상. 조사 결과 회원국들은 당장은 어렵지만 차후의 인상엔 전향적이었다. 3%의 차액은 자선가 테드 터너를 설득해 메웠다. 미국의 분담금을 당장 낮추고 회원국의 분담금은 2002년 이후로 미룰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썼으면 한진 사태는 충분히 해결 가능했다.
'협상은 제로섬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정부와 채권단이 이것만 알았어도 해운업이, 부산이, 한국이 망가지지 않아도 됐다. 새 배를 발주해 미주 노선에 투입하면 해운, 조선, 철강 등 연관 산업이 살고 용선료까지 해결된다. 여기에 신기술 개발을 촉진하면 비로소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결국 돈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바다를 살릴 것이지, 버릴 것인지 말이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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