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뭘까. TV, 비행기, 이동통신, 우주선? 모두 아니다. 세계 유수의 석학들과 언론이 뽑은 정답은 피임약이었다. 성생활과 산아제한의 자유를 이끄는 피임이야말로 여성 해방과 인류 발전에 필수조건이라는 이유였다. 피임약으로 인해 전통적인 가족구조에 혁명이 일어났고, 여성 지위를 높여 사회활동에 나서게 함으로써 역사를 바꿨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결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한때 기혼여성에게만 판매가 허용될 정도로 피임약이 일반화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과거 무너졌던 우리나라 성비는 남아 선호와 한 자녀 낳기라는 시대적 흐름이 빚어낸 비윤리적 낙태에 기인한 바 컸다. 1980,90년대 임신 초기 태아의 성을 확인한 뒤 여아일 경우 낙태하는 일이 횡행했다. 당시 벌어졌던 웃지못할 실화 한 토막. 1997년 20대 회사원이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식을 앞두고 처가에 각서를 써야 했다. '다음 해 5월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기를 갖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1998년은 범띠해. 여아가 태어나면 팔자가 드세져서 풍파가 심하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피임과 낙태가 절정을 이뤘을 당시 세태가 눈에 선하다.
미국에서는 1973년 연방대법원의 한 판결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 주 법률에 낙태 자유는 여성 개인에게 있다며 위헌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소송을 제기했던 노마 매코비란 여성은 판결까지 4년을 기다리느라 낙태를 못한 건 물론, 사회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낙태 반대 운동가로 돌아섰다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시적으로 낙태 여성을 용서해주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그동안 동성애와 이혼 등 금기 사안들에 대해 포용적인 자세를 보여온 걸 감안하더라도 파격적이다. 이에 대해 교황은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황한 교황청은 "낙태의 죄가 지닌 무게를 축소하려는 게 아니라 자비를 베풀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라며 얼버무렸고.
지난 1월 우리 대법원은 반강제적으로 정관 및 낙태수술을 받은 한센인 203명에게 정부가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온갖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받는 이들에게 출산금지까지 강요한 건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이다. 교황이 적시한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엄격한 교리와 아픈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교황의 고뇌가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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