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쓰리랑부부'라는 인기 코미디 프로가 있었다. 여성들이 억눌려 살았던 시절, 험악한 일자눈썹에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남편을 납작하게 만든 순악질 여사는 주부들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준 주인공이었다. '전원일기'도 아빠시대의 전성기를 보여준 연속극. 당시만 해도 남편과 아버지는 헛기침 하나로 집안을 지배하는 절대자로 군림했었다.

월급봉투는 가정권력을 유지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었다. 외벌이가 대세였던 터라 온 가족이 아빠의 월급봉투에 목을 맸기 때문. 두툼한 노란 봉투를 내놓는 날이면 밥상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아내는 다소곳이 윗도리를 받아들고, 애들은 아빠가 사온 과자며 음료에 환호성을 지르며 매달렸으니 남편하는 맛이 쏠쏠했다. 봉투는 아날로그식 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호시절은 디지털시대로 들어서면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현찰 한 번 만지지 못한 채 '마님' 통장으로 통째 들어간다. 자동이체라는 괴물로 인해 월급봉투는 멸종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가계 경제권은 아내에게 넘어가고, 여성이 막강한 소비주체로 등장했다. 반면 가장들은 용돈을 받아쓰는 불쌍한 처지가 됐고.

이제 또 다른 멸종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다. 타깃은 종이통장. 통장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고, 무엇보다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이 뜨고 있기 때문이다. 가로 14㎝, 세로 9㎝ 크기에 20쪽 종이가 들어찬 통장은 그냥 종이가 아니다. 그 속에 촘촘히 새겨진 숫자가 커질수록 희열감이 더해간다. 갖고 있는 통장 수가 고통을 감내한 인간승리이자 희망의 척도로 여겨졌다. 그런 통장이 120년 역사를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2017년 9월부터 금융사들은 노인을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할 수 없다. 당장 오는 9월부터 종이통장을 원하지 않는 고객들에게 금리 우대 등 인센티브를 준다. 아날로그 통장이 월급봉투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2순위 멸종후보로 플라스틱카드가 꼽힌다. 이미 스마트폰 하나로 실시간 확인과 상품 가입과 해지 등 금융거래가 다 되는 세상이니 그럴 만도 하다. 통장과 현금 대신 인터넷·모바일 뱅킹으로 진화하면서 머지 않아 점포 없는 은행시대가 올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혁신과 발전은 좋다. 하지만 퇴출 위기에 몰릴 수많은 '아날로그' 은행원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