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오후 부산시청에서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퇴진을 위한 범시민대책위가 출범한다고 해서 잠깐 짬을 냈다. 칼럼을 쓰기도 했던 터라 이 사태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경과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은 평소에 아는 젊은 여성 시인이 항의의 뜻으로 삭발을 한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시 청사 출입구 옆에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부산 문화계의 단체장과 문화예술인들이었다. 그들은 부산문화재단 이사장의 파행적 임명에 대한 비판과 함께 향후의 방침을 부산시와 시의회 등에 묻는 질의서를 낭독했다. 부산시의 문화행정을 비판하는 짧은 1인 퍼포먼스에 이어 서른다섯 살의 여성 시인 이민아 씨의 삭발식(?)이 열렸다. 치렁한 머릿결이 가위와 '바리캉'으로 천천히 잘려나갔고 그는 곧 까까머리 중학생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머리를 자르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선임이)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과 윤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이 약한 시인 하나의 시민 불복종 선언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항거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이렇게도 되물었다. "누가 뒤에서 시킨 게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는데, 누가 시킨다고 할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평소 시를 열심히 쓰고 소외된 이웃과의 지식 나눔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는 씩씩하고 당당하게 머리를 잘랐다.

글쎄, 삭발과 단식이 흔한 세상이긴 하다. 그래도 그렇지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여성 정체성의 생명(?)이라 할 머리를 자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불가에서도 출가할 때 삭발하는 건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어내겠다는 굳은 결의의 표현이 아닌가. 내가 아는 범위에선 부산에서 문화적 이슈로 여성이 삭발한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문화예술인은 그렇게 호전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수줍음이 많아서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쑥스러워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언론 한 귀퉁이에서 밥벌이를 하면서 한편으론 소설을 쓴답시고 문단의 말석에 끼어있는 터다. 후배 여성 시인의 삭발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다. 선배란 사람들이 오죽 못났으면 아리따운 후배 시인이 머리를 자르겠다고 나서는 것도 말리지 못했을까. 우리가 해결할 테니 젊은 그대는 지켜보라고 말할 수 없었을까. 하기야 이 판국이 되도록 못 물러나겠다고 버티는 그이도 그 시인의 선배 문인이니 무슨 말을 하리오만.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선임과 관련한 부산시의 절차적, 논리적 부당성에 대해선 나 자신이 언급하기도 했고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그동안 지적해왔던 터이므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어쨌거나 젊은 여성 시인이 머리를 깎겠다고 나선 것은 그이 나름의 분노와 절망의 표현일 것이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 부산에서 예술가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기도 힘든 마당에 부산문화가 갈수록 '관변화'와 '불통화'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하는.

삭발식을 지켜보면서 느낀 또 다른 생각은 부산시에 대한 의아함이었다. 왜 이렇게 사태를 방치하고만 있을까 하는. 글쎄, 근 두 달 가깝도록 부산 문화계가 이 문제로 시끄럽지 않았나. 시민들이 문화적 삶을 누리는 데 기여하도록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도 부산시의 행정 업무다. 그러자고 만든 게 문화재단이 아닌가. 뒷받침을 받을 문화예술인들이 뒷받침을 해주는 기관의 수장이 잘못 뽑혔다고 이렇게나 항의하면 무슨 말인지 일단은 귀 기울여 들어나 봐야 할 게 아닌가. 그 동안 부산시는 문화예술인들의 말을 들어보려는, 하다못해 설득을 해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시청에까지 찾아와서 항의 집회를 열도록 부산시는 무슨 생각으로 뭉개고만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혹시 부산시 관료들의 머리엔 '우리가 나눠주는 지원금에 감지덕지해야 할 것들이 우리 하는 일에 가만있지 않고 어디 건방지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는 생각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미안하지만 세월호 사고 당시 "가만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이후 국민들은, 시민들은 더는 가만 있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 문제로 서병수 시장과 부산시가 입은 타격은 적지 않아 보인다. 취임 이후 서 시장은 의욕적인 행보를 보였다. 일자리 만들기에 전념하겠다고 여러 번 천명했고 부산시 조직의 대수술에 나서기도 한 터다. 수십 개의 산하 공기업과 출자·출연기관의 하나일 뿐인, 게다가 규모도 작은 부산문화재단의 이사장 자리야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파동이 지난 반 년간 서 시장의 행보를 다 덮어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야박한 말이지만 취임 첫해 서 시장의 업적(?)으로 시민에게 각인된 건 어쩌면 '다이빙벨 파문'과 '문화재단이사장 임명 강행 파동' 뿐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사태가 이쯤 흘러 왔다면 시장이 부산의 원로 예술인과 문제를 제기한 문화단체의 대표들을 만나 대화를 시도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수용하면 된다. 아니라면, 시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면 된다. 하다못해 제도 개선안이라도 내놔야 하지 않나. 부산시장이 바쁜 자리이긴 해도 문화예술인들을 만날 짬조차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게다. 부산시는 시민과의 소통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시장 직속의 시민소통관 신설을 직제 개편의 핵심으로 홍보한 터다. 없던 자리 하나 만든다고 시민과의 소통이 절로 이뤄지는 건 아니잖은가. 문화예술인들도 시민이다. 결과는 차치하고 소통하려는 시도는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그런 성의조차 없다면 소통관 자리를 천 개, 만 개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시민과 소통하겠다는 약속도 빈말일 뿐이다.

부산시 관계자 한 사람도, 시의원 한 명도 들여다보지 않은 집회를 마친 대책위원회의 관계자들이 질의서를 부산시에 전달하려고 시청 로비에 들어서자 실무자가 나왔다. 그는 시장이 서울에 출장을 갔기 때문에 면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담당 국장도, 과장도 보이지 않았다. 실무자에게 서류를 전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뒤로 금성철벽처럼 막아선 '출입통제 게이트'가 연극무대의 배경처럼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