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로 100일이 지난 '서병수 민선 6기' 체제가 펼칠 부산 시정의 향방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유독 후퇴, 아니 역주행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 문화예술 행정이다. 최근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서병수 시장 체제의 부산 문화행정이 얼마나 여론과 동떨어져 있고 구시대적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안이다. 부산시 관료들에게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과 안목이 없다고 해도 크게 망발은 아닌 성싶다. 이른바 '다이빙벨' 논란과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임명 건이다.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한숨이요, 터지는 건 울화다.
우선 부산 문화예술 진흥 업무의 수장인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임명 건부터. 부산시장은 엊그제 부산의 한 문화계 인사를 이사장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지명자가 부산 문화예술계로부터 마뜩잖은 평판을 받아온 사람이라는 데 있다. 연배도 적지 않아 70하고도 중반이다. 본인은 부산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진력했다고 자부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가 부산 문화계의 감투를 '마르고 닳도록' 썼던 '흘러간 강물'이라는 거다. 부산예총회장을 12년씩이나 했고 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의 집행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만 경륜이면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하며 유유자적할 만도 하지 않나. 그러나 부산문화재단을 접수(?)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최근 재단의 대표이사에 응모했다 탈락했던 터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다. 그쯤이면 그이에 대한 문화계 일반의 평가가 어떤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지 않나. 그런데 부산시의 후속 조치가 기가 막힌다. 아무런 공모 절차나 문화계 여론 수렴도 없이 떨어진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그를 덜컥 앉힌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그이가 임명되기 한 달도 전에 그 자리를 꿰찰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거다. 시의회의 고위 인사가 물밑에서 개입했다는 뒷말도 들린다. 언론에서 이런 움직임을 걱정하는 보도도 이미 나왔던 터다. 오죽하면 문화계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부산예총과 부산민예총이 동시에 그이의 임명에 강력한 반대를 표명했을까.
2선에 물러서서 후배들이 일을 잘하도록 바람막이 노릇을 해줘야 할 처지에 몸소 3전4기에 나선 그이의 집요한 도전정신을 칭찬해 줘야 하나, 아니면 들고 날 데를 모르는 욕심이라 혀를 차야 하나. 이른바 '관변 문화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문화판 감투를 서로 돌려가며 쓰고 씌우는 후진적 풍경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나 했더니 '도루묵'이 돼 버리지 않았는가. 이번 일은 이사장 임기 3년 내내 부산 문화예술계 전체를 두고두고 멍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불거진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벨' 상영 논란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다.
문화계의 반대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임명을 강행한 부산시의 배짱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난감하다. 부산 문화예술 활동 지원을 총괄하는 기관의 책임자를 권력을 쥔 몇 사람이 뒷전에서 작당해 우물딱쭈물딱 앉히겠다는 발상이 요즘 같은 민주·자치시대에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이해 불가다. 당초 시장이 맡던 이사장을 민간에 넘기겠다는 건 문화예술 행정의 민간 자율화를 앞당기겠다는 취지였다. 문화계 출신 대표이사가 재단의 실무 집행을 맡는 대신 이사장은 재단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면서 재단기금 모금에 도움을 줄 '문화 마인드를 가진 경제계 인사'를 선임한다는 복안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화계 출신 이사장과 대표이사라면 '옥상옥'이다. 자칫하면 두 직책 사이에서 권한 다툼이나 일어나기 십상이다. 전임 대표이사 시절 애써 구축해 놓았던 문화재단의 공공적 운영시스템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재단 운영이나 지원금 배분이 사적인 친소 관계나 이해 관계에 휘둘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문화계에 퍼지고 있는 걸 서 시장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바에야 시장이 이사장을 맡고 대표이사 체제 그대로 두는 게 낫다.
서 시장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논란이 된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 취소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가 스타일만 구긴 터다. BIFF 측의 대처에도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크게 시끄럽지 않을 수도 있었던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조직위원장인 서 시장 자신이다. 조직위원장이라면 일부 보수단체나 여당 의원의 상영 중단 요구에 대해 "영화제 운영의 독립성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니 일단 믿고 지켜보자. 관객과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하고 진정시키는 게 옳았다. 앞장서 상영을 하지 말라고 공개 압박을 가하는 통에 BIFF를 진보와 보수의 진영싸움 마당으로 비화시키는 데 일조한 게 아닌가.
자기가 수장인 조직을 공개적으로 공격한 건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말을 안 들으니 내년부터는 지원을 끊겠다는 소리까지 부산시 일각에서 나왔다던가. 지원금이 서 시장이나 부산시 고위공무원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왔기에 마음대로 끊고 말고 하겠다는 건가. 신임 시장을 두 번씩이나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한 부산시의 문화예술행정 보좌진의 정무 감각이 한심하다. 지난해 부산 문화계를 달궜던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임명 파동에서 그들이 배운 게 과연 있기나 한가.
헤라클레스가 길 한가운데 놓인 사과를 보았다. 발로 밟으니 사과가 커졌다. '이것 봐라'하고 계속 밟으니 마침내 길을 막을 만큼 커져 버렸다. 여신이 나타나 "그대로 두면 될 걸 왜 건드리느냐"고 나무랐다. 그냥 두었더니 화를 냈던 사과가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솝 우화의 한 토막이다. '다이빙벨' 논란이나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선임 파문도 마찬가지다. 민간에 맡긴다 했으면 쓸데없이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말고 민간의 역량에 맡겨라. 길을 닦아 줘도 모자랄 판에 관이 나서서 문화예술을 역주행시키는가. 관료들이 제가 주인인 양 문화예술계를 떡 주무르듯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잘못 꿴 단추는 풀어서 새로 채워야 한다. 그게 욕을 덜 먹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민 세금으로 지원금 몇 푼 나눠주니 문화예술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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