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 사람들의 입을 탔던 이슈 중에서 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엔 '진보 싸가지론'도 있다. 진보적 주장을 펴면서도 야당과 진보 진영에 돌직구를 자주 날려왔던 전북대 교수 강준만이 낸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이 일으킨 논쟁이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옳다, 그르다 갑론을박이 나왔고 진보 논조 신문의 칼럼에도 다뤄졌던 터다. 어쨌거나 '싸가지' 논쟁은 지리멸렬한 진보 진영의 재구성을 위해서라도 좀 더 확산돼야 할 것 같다. 일과성 '얼음물 뒤집어쓰기 이벤트'로 끝날 일이 아니다.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돼 반대 진영에 모멸감을 주는 것, 국민을 내려다보듯 가르치려는 태도, 말은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바꾸는 것. 강준만이 말하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자화상이다. 보수와 진보의 고정 지지층이 대략 30%씩이라고 가정하면 남은 40%를 어떻게 우군으로 만드느냐가 선거의 요체인데 최근 선거 패배는 이들이 진보 진영이나 야당이 보이는 '싸가지 없음'에 재수 없다며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를테면, "아직도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세요?"라며 한심해 하는 눈빛으로 무지몽매한 사람 취급하는데도 기분 좋을 이는 없다는 것. 자기 혁신에는 눈 감으면서 '정권 심판론'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 진보 자신이 초래한 위기조차도 보수언론의 음모론이라 되치기하는 태도에 중도 성향의 국민이 넌더리를 낸다는 거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 선거 흐름을 짚어보면 강준만의 지적이 꽤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일반에게 진보 진영의 '싸가지 없음'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지난 대선 TV토론에서의 통합진보당 후보 이정희의 언행일 게다. "다카키 마사오의 딸을 떨어트리려고 출마했다"고 포문을 열고선 시종 '박근혜 저격수' 노릇을 한 그에게 많은 중도 유권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게 사실이다. 유권자들은 "어떻게 친일파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아줄 수 있느냐"는, 국민을 가르치려는 이정희의 호통에 오히려 반감을 느낀 게 아닐까.
박정희의 친일파 여부는 둘째 치고 딸의 면전에서 죽은 아버지를 난도질해서야 되겠느냐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적 거부감이 선거 패배 요인의 하나라는 분석에도 일리가 있다. 이제야 하는 말인데 그 무렵 나는 김어준의 '나꼼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한편 의구심이 들었던 터다. 진영 내부의 환호야 받겠지만 더 많은 반대편을 만들어 내지나 않을까 하는. 인간이 정치적 입장을 정하는 데는 논리와 이성보다 정서적 감응이 더 큰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는 걸 이정희와 김어준은 몰랐을까.
그야, 싸가지 없기로는 여당이나 보수 쪽이 한술 더 뜬다. 자기네 잘못을 들추기만 하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게 그들의 더러운 버릇이다. 뇌물을 먹어도 여당 의원들이 더 먹질 않나. 세월호 참사를 조류 인플루엔자에 비유하거나 농성하는 세월호 유족더러 '미개인'이라거나 '시체 장사'를 한다고 모욕한 것도 그쪽이다. '폭식 투쟁'이라며 단식 농성 중인 유족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아귀아귀 먹어댄 '일베충'의 행태는 철없는 애들의 일탈이라기엔 심각한 '사이코 패스' 행태다.
똑같이 돈을 먹어도, 똑같이 인사 파행을 빚어도, 똑같이 싸가지 없는 말을 해도 국민은 보수보다는 진보에 훨씬 가혹하다. 야당이나 진보는 억울할 밖에. 하지만 그들이 놓친 대목이 있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매사를 선악의 개념으로 재단해 국민을 가르치려 했던 데 대한 부메랑이란 것 말이다. "새누리당이야 원래 그렇고 그런 치들 아니냐.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너희는 늘 정의를 독점한 것처럼 설치더니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건 뭐냐." 참여정부 시절 같은 당 김영춘이 유시민에게 했다는, "저렇게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할 수도 있을까"라는 한마디에 강준만이 하고 싶은 말이 압축돼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게다.
강준만의 비판에 진보 논객인 진중권이 반박하고 나섰다. 진보 진영의 문제는 '싸가지 없음'이 아니라 국민에게 줄 '메시지 없음'이라는 것. "민주화는 87년 이후 어느 정도 실현되었기에 대중의 욕망을 사로잡지 못하는데도 지난 대선에서 분배의 측면에선 복지와 경제민주화, 성장의 측면에선 창조경제 같은 좋은 의제를 새누리당에게 모두 빼앗기고 야당이 내놓은 슬로건은 없다. 게다가 진보정당은 NL이라는 낡은 이념 하나 처리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이석기 사태를 만나 산산조각이 났다.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게 그의 주장이다. 따지고 보면 '싸가지 없음'이나 '메시지 없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군사정권은 절대악이고, 민주화 진영은 선이다'는 80년대식 선악의 프레임에 안주한 채 '메시지 없는' 공허한 심판론을 '싸가지 없이' 반복해 온 게 아닌가.
글쎄, 내게 말하라면 오늘의 야당과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의 원인으로 '싸가지'과 '메시지'에 더해 '심지 없음'을 꼽겠다. '세월호 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유족들의 뜻을 관철시켜주겠다면 당력을 모아 사생결단 싸우든지, 아니라면 처음부터 적절한 중재안을 내놓았어야 하지 않나. 세월호 침몰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 은근슬쩍 편승해 선거를 치르려다 지고 나니 어정쩡한 타협안에 동의한다. 다시 반발에 부닥치니까 이번엔 장외투쟁이니 단식 동참이니 즉흥 투쟁을 펴고선 뒷갈망을 못해 쩔쩔맨다. 강경 투쟁을 하든, 온건 타협을 하든 알아서 해라. 하지만 태도는 분명히 해야 할 게 아닌가. 어정쩡하게 '간 보기'만 한 결과가 추석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나온 야당 지지율 19.5%란 참담한 성적표다.
2017년 집권에 대한 꿈이 아직 남아 있다면 '싸가지' 논쟁을 덮어버리려 할 게 아니라 확대시켜야 한다. 헝겊으로 꽁꽁 처맨다고 종기가 낫지 않는다. 고름을 짜내고 바깥 공기를 쐐야 낫는다. "여당과 보수 쪽이 훨씬 문제가 많은데 왜 우리만…"이란 원망이나 "우리 치부를 드러내서 자중지란(?)에 빠지는 건 '조중동'의 분열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 따위 '눈 감고 아웅'으론 만년 야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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