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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출생의 비밀을 찾아서 /이성희

근원에 대한 의문, 가부장적 신화 너머 자아 간 경계 허물고 관계 속에서 찾아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06-26 20:25:40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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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영원한 물음이다. 그 질문은 저 까마득한 날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했던 질문이며, 그리스 아테네를 건설하는 테세우스의 질문이며, 숱한 신화의 영웅들이 제기했던 질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가장 신화적인 질문이며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질문, 가장 개인적인 물음이면서 가장 집단적인 물음이 그것이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러나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문제 때문에 불안해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언제부턴가 드라마를 기다리며 TV를 켜고 소파에 앉아 아내와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별로 오래지 않은 일상의 변화다. 벌써 드라마를 거의 모르고 살았던 그 오랜 시간이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밀려간 것만 같다. 내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임에 틀림없다. 놀랍게도 내가 본 거의 모든 드라마가 '출생의 비밀'을 모티프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재밌다. 막장 코드, 막장 드라마라고 엄청 욕을 하면서도 보는 나 같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시청률이 다들 만만찮다. 오늘날 대중과 가장 밀접한 문화가 드라마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출생의 비밀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의 모티프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시대는 분명 근원(뿌리)이 불확실한 시대이며, 삶이 불안정한 시대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된 괴물은 지역적인 삶의 전통과 작은 공동체의 경계, 안정된 생업의 토대를 쓰나미처럼 무너뜨린 지 오래이다. 인문학과 문화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목주의(노마디즘)의 유행은 기원을 해체시키고 정신의 정처와 경작지를 놀라운 해체공법으로 철거한다. 이런 흐름 속의 반작용이 출생의 비밀을 찾는 역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출생의 비밀을 찾아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현상에는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원을 해체하고자 한 것은 그 기원이 절대 권력으로 작용하여 우리들의 삶을 억압하기 때문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것은 그러한 '기원의 권력'을 다시 우리 앞으로 불러오게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이미 오래전에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밝힌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20세기 초 독일인들이 그들의 고귀한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히틀러를 그들의 '아버지'로 등장시킨 것 말이다.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의 '아버지'에게 귀의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얻고자 함은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모티프의 매우 불행한 버전이다.

모든 신화 속에서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아버지'를 만나는 데서 완성된다. 그때 영웅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 자아를 찾게 된다. 그런 신화를 SF영화로 재탄생시킨 것이 '스타워즈'다. 아버지 다스 베이더가 그를 죽이려하던 아들 루크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할 때 이 신화는 완성된다. 나머지 이야기는 사족에 불과하다. 출생의 비밀 모티프는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 즉 가부장적 부권 혈통의 확립에 관한 모티프다. 여기에는 부권적 권위와 권력, 배타적인 혈통주의와 종족주의가 담고 있는 폭력적인 파시즘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저번 대통령 선거의 결과 역시 이러한 모티프의 현실적 반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근원과 기원을 잊고 끝없이 떠돌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근원을 찾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신화로부터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 '아버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는 부권적 혈통 속에서 정립되는 '자아'가 아니라, 배타적인 자아의 경계가 무궁하게 열리는 '무아(無我)'와 '너'와 '나' 모두가 평등하게 서로 이어지고 의존하는 우주의 그물망이 열리는 곳임을 동양의 옛 지혜는 말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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