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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내가 빚진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배유안

내게 감명 준 책의 저자들에게 진 빚, 글 쓸 공간에 대한 빚을 언제 갚을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6-11 21:08:2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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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옛날 함께 공부하던 지인을 만났다. 50대, 아직 청년인 나이에 퇴직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일에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와 국가에 불만이 많았다. 평생 직장에 다니며 벌어도 서울에 변변한 아파트 하나 살 수 없는 세상을 장차 아들딸들이 헤쳐 나갈 것에 대해서는 더 불안한 모양이었다. 집과 땅이 있어도 불안한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빚진 게 참 많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태생이 소심하고 소극적었던 내가 가진 것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는 느긋한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게 분명 누군가의 덕분인 데다 이 세상에 해 준 건 없어도 받는 건 많기 때문이다.

오래전 막연하게 문학을 동경하던 시절, (그게 보통은 문학청년, 문학소녀 운운하는 청소년기이겠지만 나에게는 30대, 아직 어린아이 둘을 키울 때였다.) 아이를 업어 재우며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서서 읽을 정도로 나를 흡입시키고 감명을 준 책들 덕분에 그 시절이 얼마나 풍요로웠나를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 혹은 저자들에게 진 빚은 그 양을 측량할 수가 없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집안일의 지겨움에 넌더리를 내던 무렵이었는데도 '아, 이 글을 쓴 이의 집에서 걸레 들고 마루 닦으며 평생 살아도 좋으리' 라는 생각도 했었다. 사회생활 없이 집에만 있었어도 책으로 나를 찾아와 가슴을 뛰게 하고 30대, 40대에도 인생에 대한 꿈을 끊임없이 꾸게 한 걸 생각하면 평생 고마워해도 모자란다. 글을 쓰면서는 그 빚이 더 절절해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쓰고 싶은 테마를 발견하거나 자극을 받는 것도 상당 부분 책에서요, 쓰기 위해 뒤지는 것도 거의가 책이어서 저자들에게, 또 책을 소개해 주거나 과제를 안겨준 사람들에게 지는 빚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다양한 인물과 풍경을 그렸던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으로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쓸 때였다. 그림에서 시대상과 이야기를 읽어내려 애쓰면서 나는 그 시대를 소설과 시로 재현해 놓은 작가들에게 울컥할 정도의 고마움과 감격을 느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이야기하는 송구함은 거의가 그 시대를 산 사람, 그들에게 들은 것을 작품으로 남겨 놓은 작가들에게 빚질 수밖에 없다. 신문물이 들어와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쑤셨던 모습이나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러시아로 밤짐을 싸서 떠난 사람들의 애환들이 시로, 소설로 나에게 다가와 그림을 읽어내게 해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커다란 부채감과 함께 건강한 의욕을 같이 얻었다.

지난달에 일상의 해이함과 타성에 젖어 글이 밀리고 능률이 오르지 않아 위기감 끝에 모 문학관에서 운영하는 작가집필실에 찾아들었다. 조용한 방 하나 얻어 거기서 온종일 일에 몰두하여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왔는데 밤에 잠들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성취의 희열감 못지않게 '이 빚을 어찌하나' 하는 생각에 몇 번이나 가슴이 뭉클했다. 덕분에 오래전에 일상에 지치고 고단하여 피신하듯 찾아간 어느 절방에서 불현듯 떠오른, 내가 여기에 무엇을 해주었길래 상처 입어 떨고 있는 나를 이 방 하나가 이렇게 안아주고 뉘어주는가 하는 생각에 그대로 편안히 녹아들었던 기억까지 났다. 이번에도 오롯이 받았다는 느낌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줄기 하나를 만들 것 같다.

며칠 전에 작가명과 목차를 보고 책을 하나 주문했는데 받고 보니 동명이인이었다. 앗, 잘못 샀네 하면서 들춰본 책은 실수가 아니라 행운이었다. 두루 섭렵한 저자의 지적 경험 외에도 많은 자료들이 소개되어 있어 고마움에 책을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빚지는 일은 앞으로 계속될 모양이다.

평생 해온 일이나 살아온 인생철학을 만 원 안팎에 몽땅 나에게 넘겨준 사람들에게, 또 내가 손을 내밀거나 아니거나 내 손을 잡아끌어 준 사람들에게 나는 삶의 열정과 황홀에 대한 값으로 무엇을 지불할 것인가? 어쩌면 그 빚 갚는 걸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또다시 고마운 빚으로 불어났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나는 빚더미에 앉아 쓴 내 글이 아무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꿈에도 열정 한 술 보태줄 수 없다면 그 빚을 어찌할 거나 하는 걱정은 붙들고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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