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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나의 사전에는 뜻이 바뀐 말들이 있다 /배유안

부정적 의미를 긍정으로 바꾸니 훗날의 내가 보인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4-30 21:02:5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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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라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이건 제가 지닌 의미 자체만으로 가치 있고 귀한 것이지만 표면적 의미가 부정적이어서 대접을 못 받는 것도 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빼버렸다지만 혼자만 쓰는 나만의 사전에는 부정적인 이미지 대신 대단히 긍정적인 옷을 입고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는 어휘가 제법 있다. 예를 들면 '촌스럽다' '배가 아프다' '빈둥거리다' 같은 말은 내가 매우 아끼며 사랑하는 말인데 그중 하나가 '포기'라는 말이다.

청소년기에 책에서나 어른들로부터 이 말을 들을 때는 거의가 부정어와 함께 쓰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해버리고 싶다 등 '포기'는 상당 부분 패배, 억압, 절망을 내포하고 있었다. 꿈이나 이상, 열심히 같은 것과는 적대적이어서 멀리하고 미워해야 할 단어였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열정, 성취, 성공을 갉아먹는 나쁜 단어였다. 그렇게 단단히 훈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는 동안 무수히 이 단어의 침범을 받아 울었고, 무릎을 꺾었으며, 자괴감으로 힘들어했다. 이 단어가 나에게 적이 아니라 친구로 다가온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욕구와 소망에 비해 에너지와 시간의 결핍이 워낙 커서 날마다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불쑥 '포기' 가 제 안에 깊숙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내보였던 것이다. '포기'는 '미련 없이 버림' '더 나은 것과 바꿈'이라는 적극적 의미로 탈바꿈하여 자괴감 없도록 나를 해방시켜 주었고, '일단 미룸', '나중을 기약함', '훗날의 소망' 이라는, 가슴 설레는 상자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뚜껑이 있는 상자였다. 비로소 나는 쾌적하게 글을 읽고 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소속의 쓸쓸함이나 사회성 결여,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들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설레는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버림을 통해서 핵심을 살리는 것, 포기는 그래서 매우 전략적이다. 문장을 만들 때나 이야기를 엮을 때에도 '포기'는 빛을 발한다. 며칠 전 나는 시골구석에 여러 날 틀어박혀서까지 끙끙대며 썼던 한 챕터의 글을 몽땅 버리고도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빈둥거리다'는 말도 있는데 원래 상당히 모욕적이고 부정적인 단어였다. 게으름, 불성실, 계획이 없는, 진취적이지 못한 등등의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들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하면 듣지 말아야 할 단어였다. 그런데 늘 바쁘고 뭔가에 쫓기는 생활에 한동안 물들어 있다 보니 그것은 몹시 목마른 단어가 되었다. 결국 이 말은 여유, 느긋함, 자유, 사색이 있는, 자기로 돌아가는, 근원적 즐거움 등의 의미를 지닌 호사스러운 단어로 내 사전에 올랐다. 그것은 사전 속에서도 쑥쑥 자라서 언제부터인가는 일주일에 하루라도 온전히 누리고 싶은 거의 로망에 가까운 단어가 되었다. 이제는 누가 미래의 희망을 물을 때에 '빈둥거리다'를 입에 올릴 정도가 되었다.

'촌스럽다' 또한 내 사전에서 고급스러운 단어 중의 하나이다. 시골 촌(村)을 쓰는 이 단어는 촌티가 나다, 세련되지 못하다, 싸구려 같다, 예쁘지 않다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예전에는 시골에서 도시로 진입한 사람들의 콤플렉스였고 도시사람에게도 누구나 탈피하고 싶어한 단어였다. 지금도 스타일이 없다, 지적이지 못하다는 이미지까지 있어 남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단어 중의 하나이다. 내 사전에 비교적 늦게 등재된 이 단어는 욕심 없음, 가벼운 마음, 자연과 어우러짐, 선택한 가난, 작가스러움 등의 의미로 올라 있는데 내가 추구하는 삶의 한 모습, 이를 갖기 위해서는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배 아프다'는 말도 내 사전에서는 '시기, 질투'라는 원래의 부정적 의미 대신 '훌륭하다'는 찬사의 의미와 '나도 잘하자'는 밝고 고무적인 의미로 쓰인 지 이미 오래다. 평소 워낙 허물없이 쓰는 걸 넘어서 이제 후배들에게도 자주 '배를 많이 아파 해라'라고 권하고 있다.

일부러 애쓰지는 않지만 나의 사전에 나만의 의미를 가진, 특히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 말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이래저래 모인 단어들이 제법 되면서 나는 문득 내 사전에서 나를 발견한다. 지금의 내 모습이 보이고, 소망이 보이고 훗날의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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