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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김용철과 마르코폴로스 /제정임

누구도 의심않던 경제권력의 치부 개인 희생으로 빛봐

성역없는 비리수사 진정한 정의 구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3-16 20:21:56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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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비리를 고발한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소리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서는 이달 초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No One Would Listen)'는 제목의 책이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출간됐다. 지난 2008년 말 세계 금융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을 다룬 논픽션이다. 무려 650억 달러(약 73조 원)에 이르는 기록적 손실, 재산을 잃은 사람들의 자살 등 충격적인 사건의 경과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이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 파산을 감수하며' 삼성 고발에 나선 김용철 변호사처럼 저자인 해리 마르코폴로스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금융계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를 자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투자분석가였던 마르코폴로스는 메이도프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 투자'로 명망을 높여갈 때 도대체 그의 비결이 뭔지 궁금해서 기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숫자에 밝은 이들을 일컫는 이른바 '퀀트(quant)'였던 그는 메이도프가 투자자들에게 보낸 자료의 숫자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것은 사기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동료들과 정밀 분석을 거친 그는 메이도프가 뒤에 들어오는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수익금을 주는 폰지 스킴(Ponzi Scheme),즉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금융 부조리를 감시하고 뿌리 뽑아야 할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고발을 받고도 도대체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기술주 중심 증시인 나스닥(NASDAQ)의 회장까지 지낸, 미국 금융계 최대 거물 중 하나인 메이도프가 사기꾼일 리가 없다는 게 SEC의 반응이었다. 아무리 증거를 거듭 들이밀어도 금융전문가가 아닌 법률가들 그리고 메이도프의 친구들이 지배하고 있는 SEC는 이해하지 못했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000년에 시작된 마르코폴로스의 외로운 투쟁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더 이상의 자금을 끌어 들이지 못한 메이도프가 무너지면서 9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 사이 금융비리 조사 전문가로 직업까지 바꾼 그는 메이도프가 자신과 가족을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늘 총을 지니고 다니는 등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마침내 승리했지만 그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처음 고발했을 때 막았다면 100억 달러대에 그쳤을 피해가 6배로 커졌다."

마르코폴로스의 증언은 부조리를 감시해야 할 공적 기관들이 제 몫을 다하지 않을 때, 그 사회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비록 상처뿐인 영광일지라도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한 마르코폴로스의 여정은 삼성에 대한 고발이 아직도 진행 중인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차명계좌를 이용한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탈법적인 경영권 상속과 이사회 등의 기록 조작, 수사기관을 속이기 위한 위증 훈련 등 삼성 최고경영진의 가공할 비리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 개입한 김 변호사 자신의 범법행위도 숨기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라면 명예훼손 등으로 저자가 붙잡혀 가야 할 일이고, 사실이라면 당국이 나서서 응분의 조치를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검찰과 금융당국 등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이다. 하기야 이미 기소된 혐의에 대해서도 솜방망이 처벌에 이어 사면조치까지 이뤄졌으니 '새삼 들춰봐야 무엇하랴'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걱정되는 것은 이미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 특히 청소년들의 반응이다. 이런 일들이 폭로되었는 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니, 법치주의는 뭐고 정의는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생각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마르코폴로스가 처음 금융사기를 고발했을 때 당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면 미국인들의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고 메이도프 자신도 150년형을 선고받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삼성과 대한민국은 어떨까? 공권력이 귀를 막고, 언론이 입을 닫고, 아무것도 고치지 않은 채, 언제까지나 달릴 수가 있을까?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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