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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77번 국도에 관한 단상 /정지창

남해안 전체 당일여행 '청사진'…서글픈 조급증 효율주의의 발로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3-10 21:10:12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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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야 나는 동서로 연결되는 국도는 짝수로,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는 홀수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1번 국도는 목포에서 신의주를 잇는 남북노선이고, 2번 국도는 부산에서 목포(정확하게는 신안)를 잇는 동서노선이다.

일제는 조선의 물자수탈과 군사적 목적을 위해 1904년부터 폭 8~10m의 '신작로'를 닦기 시작했는데, 1번 국도는 주로 값싼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건설했고, 2번 국도는 동학농민들을 토벌하다 붙잡은 조선인 '폭도들'을 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가 만든 도로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수탈과 침략의 도구였다.

알다시피 개화기는 조선의 근대화와 일제의 식민지배가 동시에 진행된 시기였다. 여기서 얼핏 생각나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은 상호모순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개념이 아닐까?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 말아/ 촌년의 기름머리 눈꼴 난다/ 낙동강 칠백리 공굴 놓고/ 하이카라 잡놈이 왕래한다." 당시 경남 함안 지방에서 불리던 민요에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민초들의 착잡한 심사가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국도 77호선이다. 홀수니까 남북을 잇는 도로인 줄 알겠지만, 실은 부산에서 목포를 거쳐 개성까지 이어지는 약 900km의 서남해안도로를 가리킨다. 국토연구원의 계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남해안의 섬들을 연결하는 77번 국도를 중심으로 관광과 산업벨트를 조성하여 수도권에 버금가는 대한민국의 중심축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꿈 같은 청사진에는 흥미도 없고, 그런 꿈이 실현될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다고 본다. 지금 정부는 근본적으로 국토의 균형발전보다는 수도권중심 정책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는 것도 다 수도권중심 정책 때문이 아닌가. 게다가 4대 강 사업에 수십조 원의 거금을 쏟아붓느라 나라 살림이 휘청거리는데, 어떻게 별도의 재원을 마련하여 서남해안발전계획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77번 국도는 언젠가 개통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길 닦는 일은 정권과 관계없이 관성처럼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해안 일대를 2시간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안을 보니 77번 국도는 운명처럼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자동차로 두세 시간 만에 도착하여 당일치기로 구경을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도시 사람들의 조급증은 이제 치유가 불가능하다. 막상 77번 국도가 뚫리면 나도 차를 몰고 서남해안길을 달려보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름다운 섬들은 배를 타고 가서 며칠 묵으면서 천천히 구경하면 될 텐데 왜 꼭 차를 몰고 후딱후딱 보고 치우려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과감하게 차를 없애지 못하는 내 꼬락서니가 한심하기만 하다.

개화기의 유생들처럼 근대화의 대세를 무조건 막거나 되돌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로 만든 길을 따라 '하이카라 잡놈'이 왕래하며 설치는 것은 눈꼴이 시지만, 어느새 나 자신이 그 '하이카라 잡놈'이 되어버린 것을 어쩌랴. 그렇다고 두 손 놓고 하늘만 쳐다볼 수는 없지 않은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처럼 좀 쑥스러운 느낌은 들지만, 진정한 관광은 두 다리로 천천히 걸으면서 두 눈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이라고 내 안의 '하이카라 잡놈'을 끈질기게 설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경쟁과 효율, 돈과 권력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은 천천히 걸을 때만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득, 부산의 민주공원에서 출발하여 김해 봉하마을과 마산의 3·15 기념탑을 거쳐 한려수도를 따라 걷다가 섬진강을 거슬러 지리산 자락을 감돌아 광주의 5·18 묘지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를 그려본다. 이것은 77번 국도와는 차원이 다른, 민주화의 성지 순례길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천릿길을 발목이 시도록 느릿느릿 걷다 보면 지역감정의 옹색한 울타리에 갇힌 민주주의의 상상력도 삼차원으로 확장되어 노고지리처럼 힘차게 창공으로 비상하지 않을까?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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