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인 가장 큰 사건은 강호순 사건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일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깊숙한 심층을 정말 잘 보여주었던 것 같다. 강호순의 존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끔직한 단면을,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개인인 그 존재 자체가 온 국민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버팀목이었던가를. 그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크다고 느껴지는데 그가 살아계시던 생전에 그 자리의 크고 넒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쉽다.

오래 전의 기억인데 늘상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또 하나 있다. 나를 영세 주신 신부님에게 사촌동생이 한 분 계셨는데 기도원에서 기도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신부님 한 분과 사랑에 빠진 일이 있었다. 신부님은 자신의 친구인 신부님과 동생의 염문으로 신부님 한 분이 옷을 벗게 되어 김수환 추기경께 죄송한 마음으로 이 일을 사죄드린다는 간절한 편지를 쓰셨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그 두 분도 모두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라는 짤막한 답신을 보내주셨다. 이 문장이 정말 오래도록 내 맘에 남아 있었는데 보기 싫은 사람을 보거나 생각할 때는 그 말의 향기로 나의 증오심과 미움을 달래곤 했다. 이 짧은 기억 말고는 사실 나는 추기경같은 분이 나와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특정한 인물을 보고 흠모하며 존경하는 생각을 가질 때는 그런 분이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특별한 분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옆에 계시는 어떤 분의 온화함과 강인함은 그저 평범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 옛날 내가 느꼈던 향기를 맡고 인간으로 살게 하는 것은 출세하고 싶은, 부자가 되고 싶은, 유명해지고 싶은 강력한 욕망의 드라이브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 더 잘 사는 나라, 더 잘 사는 집안, 남보다 더 훌륭한 직업과 외향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산업화되었던 1970~80년대 그리고 현재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던가를 김수환 추기경의 삶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조명해주었다. 한마디로 말해 강호순같은 사이코패스를 만들어냈던 사회, 아파트 평수로 사람의 인격이 저울질되는 사회, 배 고플 때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아래 똘똘 뭉쳤던, 그래서 배는 불러졌지만 잃어버린 그 수많은 미덕들….

나는 TV로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스로 반문해보았다. 나 자신의 돈에 대한, 권력에 대한, 사회에 대한 태도들의 이기심과 오만함에 대하여. 1970~80년대 나는 보통의 지식인처럼 느끼고 반응하며 살았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로만 분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엄살을 부리고 겸손하려 애쓴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소유하려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어. 이대로 살 수밖에 없어"라면서 패배주의로 회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면서 얼굴 붉히면서 무슨 정의의 사도인 양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았던가. 김수환 추기경의 관이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지에 운구되어 땅으로 묻히는 순간을 보면서 나는 "그들도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넘치지 않게 사랑하고, 넘치지 않게 분노하며, 넘치지 않게 욕망하며,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옮음을 행하고 넉넉하게 생색내지 않고 용서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작심삼일'이라고 했던가. 그 분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의 와중에서 이런 다짐을 해보건만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가 무너지고, 미국 은행들이 문을 닫고,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가 파산 신청을 하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새로운 경영이나 금융제도를 만들어내고, 유능하기만 한 엘리트 금융전문인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김수환 추기경의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는 일이 더 급한 일일 것 같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고 했는데, 그러나 굶어죽어도 빵만으로는 또 살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우리들생명과학 회장